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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비스커스 Apr 13. 2023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_사르트르


이 영화를 본 지는 좀 됐다.

처음엔 혼자 보고, 두 번째는 아내와 함께 봤다.

솔직히 처음엔 10분을 다 보지 못했다. (언급했듯 다른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목가적 분위기도 싫었고, 주인공의 표정도 답답했다.

제목과 섬네일에 낚여 돈을 지불했다.

후회가 막심했다.

그러다 다시 이 영화가 영화제 후보작이 되며 주목을 끌었다.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영화를 같이 보게 됐다.

여전히 내가 느낀 감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아내가 옆에 있기에, 참고 앉아 있었다.

(영화 내용은, 영화를 보든지 찾아보면 다 나온다)


'일을 안 하네? 행복해 보인다.'


내가 툭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이 점이 내가 이 영화에 감동하거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 같았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실존과 관계에 대해 고민한다.

생계나, 일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다.

누구도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어떤 힘도 그들을 강제하지 않는다.

오직 아름다운 풍경과 평화로운 일상만 제공된다.

나는 생각한다. '즐기면 되는데, 왜 실존을 고민할까?'


예술이나 사랑은 '살아있음' 보다 의미, 가치 있지 않다.

두 가지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오직 살아있음 만이 지금 확실한 그 무엇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정말 훌륭한 나라다.

국민에게 실존을 선물한다.

바로 빚이다.


투기를 부추기고, 경쟁과 소비를 장려한다.

굳이 실존을 스스로 찾을 필요가 없다.

국가가 제공한다.

집이 없게 만들고, 집을 사게 만들고, 빚을 지게 만들어 평생 일하게 한다.

취업과 진학을 어렵게 만들어, 모든 학생을 경주마로 만든다.

실존을 고민하는 학생이 과연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취업과 진학이 모든 관심사다.

순위를 매기고, 감상을 남긴다.  

자연히 나의 실존은 아파트 이름과 자동차, 지갑, 회사명이 된다.

드라마를 보며, 선남선녀들의 사랑을 구경한다.

이렇게 길들여진다.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장의 부속이 된다.

(사회주의가 더 끔찍한 건, 부속을 '영웅'이라 부르는 가식에 있다)


나에게 실존은, 과분하다.

이 영화가 재밌지 않은 이유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번 볼 가치가 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점심에 죽어도 좋다.'

몇 시간이 평생보다 더 기쁘단 얘기 같다.


정치인들을 보며, 범죄자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왜 저러지?'

내가 생각한 이유는, 남보다 우월하다는 게 그들의 실존이다.

우월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폭력이다.

존경은 너무 어렵다.

특히 우월이 실존인 이들에겐.

더 큰 폭력은 더 큰 만족을 불러온다.

그게 제일 큰 공포다.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그 무엇이고.


 가장 부유한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을 국회의원으로 뽑을 수 있었 이유가 아니었을까? 우월함만 보장된다면, 식민지고 국가부도고 의치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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