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비스커스 Mar 08. 2024

가여운 것들

젊은 시인이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건,

젊은 시인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왠만하면 영화를 가리지 않는 편이라, 이 감독의 영화를 몇 편 봤다. 

'랍스터' 도 그 중 하나다. 

결혼을 안 하면 랍스터(주인공의 형)가 된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호평에도 불구하고 재미없었다. 

'가여운 것들'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걸작이라고 난리다.

난 두 번 보고 싶지 않은 영화다. 

아주 난해한 시를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해석을 요하는 자세였다. 


왜 일까?

난 해석할 힘이 없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깨달음으로 즐거움을 찾고 싶지도 않다. 

혹자는, 이 영화가 ai시대를 맞는 인간의 불안을 다룬다고 한다.

여주인공(빅토리아)이 ai라고 한다. 

남자들은 이용자인 인간이고. 

가여운 것들은 ai를 마냥 두려워하는 사용자들이라고.

그런가?

그런가 보다. 


핸드폰이 새로 나올 때마다, 교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

애플 노트북이 나올 때마다, 매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난 아니다. 

하물며 이 시대에도 보조를 못 맞추는데, 미래를 두려워한다고?

웃기는 소리다. 

나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고 납득하지 못하는데, 은유된 ai를 고민한다고?

할 일도 참 없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보자.

사장이 ai던 인간이던, 우리의 임금받는 삶이 달라지나?

인간이 돈 주면, 명령하면, 더 인격적 대우인가?

인간한테 욕먹으면, ai가 욕하는 것 보다 덜 기분이 엿같나?

제일 웃기는 게,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느낀다는 거다.

모든 인간은 그 자신만의 우주를 갖고 있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 우주가 60억 개란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 

매일 우주가 소멸하고, 탄생한다. 

그렇게 치면, 별 거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 뭔가를 써야지 할때 떠오른 느낌은 이랬다. 

젊은 시인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으면, 세상이 우습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나이가 들면, 죽는 게 그리 의미있단 생각이 안 든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쩜 나만 더 초라해 진다. 

그래서 죽지 못해 산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어가는 게, 그나마 덜 민폐인거다.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아는 사람같은 사람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어쩜 지금, 인간의 온기를 느끼려 영화를, 책을 읽는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난해한 시는, 시간, 돈이 여유로운 존재들에게나 어울린다.


내가 생각하는 가여운 것들이 있다. 

죄를 평생 지어 놓고, 구원해 달라고 조른다.

돈 갖다 바치고, 몸 갖다 바친다.

그게 종교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 있다.

그게 되겠나?

스스로도 용서가 안 되는데.

스스로 죄인이라 이미 느끼는데.


어떤 목사가 한 말이 있다. 

교회가서 소원 빌지 마세요. 

부자 되게 해달라고, 서울대 가게 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기도는 신과 가까와지는 수단일 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도그데이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