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이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건,
젊은 시인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왠만하면 영화를 가리지 않는 편이라, 이 감독의 영화를 몇 편 봤다.
'랍스터' 도 그 중 하나다.
결혼을 안 하면 랍스터(주인공의 형)가 된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호평에도 불구하고 재미없었다.
'가여운 것들'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걸작이라고 난리다.
난 두 번 보고 싶지 않은 영화다.
아주 난해한 시를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해석을 요하는 자세였다.
왜 일까?
난 해석할 힘이 없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깨달음으로 즐거움을 찾고 싶지도 않다.
혹자는, 이 영화가 ai시대를 맞는 인간의 불안을 다룬다고 한다.
여주인공(빅토리아)이 ai라고 한다.
남자들은 이용자인 인간이고.
가여운 것들은 ai를 마냥 두려워하는 사용자들이라고.
그런가?
그런가 보다.
핸드폰이 새로 나올 때마다, 교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
애플 노트북이 나올 때마다, 매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난 아니다.
하물며 이 시대에도 보조를 못 맞추는데, 미래를 두려워한다고?
웃기는 소리다.
나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고 납득하지 못하는데, 은유된 ai를 고민한다고?
할 일도 참 없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보자.
사장이 ai던 인간이던, 우리의 임금받는 삶이 달라지나?
인간이 돈 주면, 명령하면, 더 인격적 대우인가?
인간한테 욕먹으면, ai가 욕하는 것 보다 덜 기분이 엿같나?
제일 웃기는 게,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느낀다는 거다.
모든 인간은 그 자신만의 우주를 갖고 있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 우주가 60억 개란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
매일 우주가 소멸하고, 탄생한다.
그렇게 치면, 별 거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 뭔가를 써야지 할때 떠오른 느낌은 이랬다.
젊은 시인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으면, 세상이 우습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나이가 들면, 죽는 게 그리 의미있단 생각이 안 든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쩜 나만 더 초라해 진다.
그래서 죽지 못해 산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어가는 게, 그나마 덜 민폐인거다.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아는 사람같은 사람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어쩜 지금, 인간의 온기를 느끼려 영화를, 책을 읽는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난해한 시는, 시간, 돈이 여유로운 존재들에게나 어울린다.
내가 생각하는 가여운 것들이 있다.
죄를 평생 지어 놓고, 구원해 달라고 조른다.
돈 갖다 바치고, 몸 갖다 바친다.
그게 종교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 있다.
그게 되겠나?
스스로도 용서가 안 되는데.
스스로 죄인이라 이미 느끼는데.
어떤 목사가 한 말이 있다.
교회가서 소원 빌지 마세요.
부자 되게 해달라고, 서울대 가게 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기도는 신과 가까와지는 수단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