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비스커스 May 16. 2024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잔혹극

젊음이 좋다.

치기어리기 때문이다.

다만 선을 넘지 않을때 얘기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연기는 괜찮은데,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대부분 공감이 되지 않았다.

과장되고, 편협했다.


세상을 이렇게 본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화를 내는 건 좋은데,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

그럼 허무와 좌절만 남는다.


이 영화긔 가장 짜증나는 부분은,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증오한다는 데 있다.

왜? 부자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자들이 어떻게 돈 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제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냥 눈에 보이는 단편적인 면이 세상의 전부인냥 씨부린다.

물론 어리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며, 방패다.


내가 좋아하는 유시민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 못 바꿔요.'

'김문수 같은 사람은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 않을까요?'

무고한 사람을 마구 죽인다고, 내가 행복해 지지도, 세상이 바뀌지도 않는다.

그걸 보는 사람은 헛웃음도 안 난다.


내가 생각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있다.

부자는 하나 하나 쌓아간다.

가난한 사람은 한 방에 얻으려 한다.

어쩜 정서의 문제고

어쩜 환경의 문제일 수 있다.

세상은 씨름판이다.

천하장사 뽑는데, 체중은 상관없다.

약하다고 봐주는 거 없다.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는 말이 있다.

문제는 가만히 앉아 책을 볼 정서적, 물리적 환경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근데 그 차이는 아이큐보다 훨씬 더 갭이 크다.

머리가 나빠도 교육을 잘 받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 생각해 보자.

내가 부자고, 권력자다.

그럼 가난한 사람들이 공부잘해서 능력을 갖추는 걸 바랄까?

아님, 기계처럼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길 바랄까?

의사가 많아져서 좋을 게 뭐 있을까?

지금도 충분히 상류층만 진학하는데.


항상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작가의 이전글 특효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