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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
- 올려다 본 하늘에서 막대의 끝이 보인다. 자기 입보다 긴 나뭇가지를 물고가는 새의 모습 속 나는 멋대로 그 너른 하늘을 날아 차곡차곡 쌓아갈 그의 집을 그린다. 어떻게 저런 둥지를 지을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짓는걸까, 둥지를 짓는 새의 마음은 어떨까. 아마 떠다니는 내 의문을 만난 새는 그렇다면 저 애의 둥지는 뭐길래 어떻게 짓는지도 모를까 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게 함께 가다 멈춘 그의 날개짓에서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둥지를 발견한다. 입에 물었던 또 하나를 내려놓고 단단함을 다지며 곧 둥지를 따뜻하게 데울 가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고는 바라겠지. 바란다는 말도 인간의 말이기는 하지만, 그가 행한 단단함만큼 든든하게 가족을 지키는 둥지가 되기를. 존재를 위협받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도록,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온기를 나눌 공간으로 남도록. 나뭇가지를 하나 더 물어다 주지도, 벌레를 넣어주지도, 데워주지도 못한 채 나는 콩콩 거리는 그의 발걸음이 미끄럼 없기를, 비행이 무겁지 않기를, 내 마음의 포근함이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만든 둥지가 안전한 집이 되기를.
새장
- 안전하다고 해서 다 좋지는 않다. 손가락을 최대한 펼쳐 두 엄지손가락 끝을 맞댄 너비만큼의 새장에서 날개를 펼칠 수만 있는 작은 새를 그린다. 천장있는 하늘은 내려오는 무언가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하다. 내 입장이 그렇다. 새장 속에서 더 작아보이는 새가 왜 저기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의 형형색색 때문에? 덕분에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새장에 남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괴롭다. 그들을 위한 건 아니라고 느껴져서. 다시 새장 속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보아도 그들이 가고 싶은 건 반대쪽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새가 아니면서 말이다. 이것 또한 인간인 나의 입장일 수 있는데. 인간의 눈을 위해 만든 비극이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새장 문을 열고 그들의 원래 집으로 보내주고 싶다. 화도 난다. 합리화 할 수 없는 비극적인 프레임을 톡톡 하나 하나 다 끊어버리고 싶다. 훨훨 날아가는 그들을 보고 싶어진다.
둥지의 존재
-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둥지 너머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꽤 오래되었다.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나의 둥지는 온데 부모님의 눈길, 손길, 발길이 닿아있다. 20살이 되면서 나와 내 동생은 전화로 뛰어도 튼튼한 우리들의 둥지에 대해 소리를 높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석구석에 있는 온기가 내 안에 퍼져 그게 내가 된 걸 우리는 하나하나 찾아냈다. 감사하고 감사한 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