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욕망, 불륜, 시기, 질투… 리브 콘스탄틴은 아마 미국에서 이런 스타일의 막장 드라마를 맛깔나게 쓰는 작가 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읽은 책은 겨우 한국어판 『마지막 패리시 부인』과 영어 원서 『The Wife Stalker』가 전부이지만, 두 작품만 읽었는데도 작가가 어떤 내용을 어떤 식으로 전개시키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과 그에 대한 적나라한 욕망, 그리고 남녀 사이의 정사, 성적 욕구를 난잡하게 그려낸다. 야한 내용을 기대하고 본다면 실망할 것, 오히려 이런 욕구를 상당히 저급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거북할 수 있다. 이 설명만으로도 대충 감이 잡힐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리브 콘스탄틴의 작품을 선택한다면 읽는 내내 길티플레져(취향에 따라 플레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함정=은 나)와 계속해서 폭발하는 도파민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작품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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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스토리
호화로운 삶을 꿈꾸며 부유한 유부남에게 접근하기 위해 교묘한 계획을 실행하는 주인공(앰버 패터슨)을 중심으로 풀어 나가는 『마지막 패리시 부인』는 언제나 재벌이 등장하는 K 로맨스 드라마, 물 잔을 상대방에게 끼얹거나 김치로 따귀를 내려치는 K 막장 아침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순진하고 씩씩한 여주인공을 둘러싼 보송보송한 로맨스와 악역의 시기와 질투 대신, 노골적인 탐욕들로 얼룩져 있을 뿐이다. 피상적인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만큼 등장인물들도 굉장히 평면적이고 이야기도 상당히 일차원적인 데다, 진행되는 이야기의 호흡이 굉장히 짧아서(각 장의 길이가 정말 짧다) 속도감 있게 읽힌다.
나름의 반전이라고 하면 반전이 될 만한 부분이 있는데, 치밀한 트릭으로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야 하는 종류는 아니다. 작가가 반전에 대한 힌트를 여기저기 소소하게 뿌려놓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내용 역시 아니다. 시쳇말로 뇌를 풀고 그저 술술 읽으면서 그저 등장인물들의 저급함과 함께, 노골적인 탐욕과 욕망을 감당할 수 있다면(즐길 수 있다면 더욱) 폭발하는 도파민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아이디어, 전혀 다른 느낌의 두 작품
이야기의 아이디어나 내용이 『비하인드 도어』(영어 원제: Behind Closed Door)와 상당히 유사한 지점이 있는데, 서로 가진 아이디어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디어가 표현되는 방식은 너무나도 차이가 나서 개인적으로는 비교를 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비하인드 도어』를 영어 원서로 읽었고, 상당히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라서 『마지막 패리시 부인』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리브 콘스탄틴 작가님… 죄송하지만, 저는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즐겨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과 비교해도 아쉬운 퀄리티
앞에 열심히 쓴 이야기들에서 은근히 드러났겠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패리시 부인』은 별로였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나는 막장 드라마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뼛속까지 세속적이고 얄팍한 인물들의 극단적인 욕구와 행위를 지켜보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가 빨린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리브 콘스탄틴의『The Wife Stalker』를 먼저 봤기 때문에 『마지막 패리시 부인』이 조금 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The Wife Stalker』는 패리시 부인과 아주 유사하다. 반전을 위해 모든 이야기가 흘러가고, 매력적인 남자를 사이에 두고 집착과 욕망이 얽히며 온갖 낯 뜨거운 일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The Wife Stalker』의 아이디어가 『마지막 패리시 부인』보다 더욱 흥미로웠던 것도 있고, 트릭을 사용하는 작가의 기교도 훨씬 더 세련된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추억 보정일까?) 무엇보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 반전은 전혀 놀랍지 않았던 것에 반해, 『The Wife Stalker』의 반전에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있다.
뒷심이 부족한 작품
무엇보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의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은 초반 절반쯤은 나름 공을 들여 이야기를 엮어 내는데 써놓고, 그 뒤로는 그 초반부의 뒷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모두 할애해 버린다는 데 있다. 소설은 작가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등장인물의 행동과 사건의 묘사로 보여주는 예술인데, 『마지막 패리시 부인』의 중반부 이후로는 묘사가 아니라 설명이 계속 이어지고 등장인물이 대사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줄줄 읊어댄다.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도저히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름 흥미로운 소재이고 『The Wife Stalker』를 생각하면 이보다는 훨씬 더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쉽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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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도파민 자극제가 오히려 영어 원서 읽기에 도움이 될지도……?
이렇게 그저 그랬다는 이야기를 줄줄 길게 쓰고 있는 이유는 사실 다름이 아니라, 리브 콘스탄틴이라는 작가를 영어 공부에 잘 활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나는 도파민 중독자들이 영어 원서 읽기에 도전할 때 입문할 만할 작품으로 리브 콘스탄틴의 소설이 꽤나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 영어 표현의 난이도가 다른 소설들에 비해서 상당히 낮다. 단순하고 짧은 문장들이 많고, 전문 용어나 복잡한 상황이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2. 짧은 호흡에 단순한 인물 구성. 각 장이 굉장히 짧은 편이라 끊어 읽기 편한데다, 등장인물들의 수가 적고 단순하다. 한글로 된 소설을 읽어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외국어면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게 어려운 경우가 가끔 있는데, 리브 콘스탄틴의 작품은 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에게 극단적일 정도로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어 관계를 파악하고 외우는 어려움이 없다.
3.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내용에 도파민은 덤. 깊은 사유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성 높은 소설을 읽는 것은 당연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안 그래도 영어를 읽느라 머리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에너지가 두 배로 든다. 영어 문장을 읽고 해독하는 데 머리를 쓰는 대신, 내용은 생각 없이 따라갈 수 있는 단순함이 원서 읽기의 허들을 낮춰준다. 거기에 고자극 도파민 뿜뿜 하는 내용은 우리 저 아래에 숨겨져 있는 날 것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재미를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욕하면서도 어쩐지 끌리는 막장 드라마를 즐기는 고자극 도파민 중독자들에게 슬쩍 리브 콘스탄틴의 작품으로 영어 원서에 입문하기를 추천해 본다. 물론 한국의 막장 드라마와는 또 다른 미국식 막장이 유교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뼛속까지 선비인 내 기준에서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브 콘스탄틴 작품은 정말 고자극을 추구하는 성인분들만 읽기를 바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야해서가 절대 아니다(약간의 정사 장면이 나오지만 대단할 것 없는 한두 줄일 뿐이다). 그것보다 정말 날 것의 악의는 우리의 영혼을 더럽힐 수도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개인적으로 정말 안 좋아합니다, 정말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