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빨리 회복하느냐가 진짜 실력.
2025년 달력을 펼쳐보았다. 하얀 여백보다 다양한 일정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회사 주요 회의, 워크숍, 자녀 시험, 가족 모임, 그리고 특히 골프 일정이 눈에 띄게 많았다. 1월부터 10월까지 총 39회의 라운드와 17회의 레슨, 제주도 1박 2일, 중국 대련 2박 3일, 청도 3박 4일의 골프 여행도 있었다. 공항의 공기, 아침 7시 첫 티샷 전의 긴장, 낯선 코스의 풍경들. 2025년을 돌이켜보면, 나의 한 해는 ‘골프’로 시작해 ‘골프’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10월에는 특히나 무리했다. 한 달 동안 무려 7번의 라운드를 했다. 세 번 연속 필드를 나간 날에는 설렘보다 피로가 쌓였다. 골프가 즐거움이 아니라 ‘의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좋아하던 골프가 부담되고, 기다려지던 날이 피하고 싶은 날로 바뀌었다.
11월 2일 올해 마지막 라운딩, 전날까지도 일기예보가 비로 바뀌길 기도했다. 10월의 마지막 라운딩에서 샷이 무너지면서 멘탈도 바스락거리고 골프에 질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올해의 마지막 라운딩을 무난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첫 티샷을 날릴 때, 속으로 되뇌었다. “올해의 마지막 라운드이니 욕심내지 말고 가을 날씨를 즐기자.” 마음을 비워서 그런지 공이 잘 맞았다. 전반 2오버. 샷감이 좋았다. 후반 첫 홀을 마칠 때, 마음 한켠에 작은 기대가 피어올랐다. ‘혹시 오늘, 70대 싱글을 칠 수 있을까?’ 그 기대감이 문제였을까. 후반 두 번째 홀에서 쿼드러플(Quadruple)을 하며 결국 81타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순간 아쉬움보다 감사가 먼저 들었다. 직전 라운드에서 무너졌던 멘탈이 다시 일어섰다는 사실, 그리고 81이라는 숫자가 주는 현실적 안도감.
‘골프는 나와의 싸움’이라는 말이 맞다.
그건 단지 코스 위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욕심과 자만,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나 자신을 컨트롤하는 싸움이었다.
하버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인간의 경험을 평가하는 기준을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으로 설명했다. 우리는 경험의 전체보다 가장 강렬한 순간(Peak)과 마지막 순간(End)으로 기억을 만든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올해 내 골프도 그랬다.
1월, 겨울이지만 그나마 덜 추웠던 날, 기분 좋은 라운드.
3월, 내 생애 두 번째 샷이글.
9월, 청도 3박 4일 100홀 라운드. 무척 더웠지만 골프에 진심인 멤버들과 잊지 못할 추억.
10월, 한 달에 7회 라운드. 직장인으로서 원 없이 쳐봤다. 소모임 골프대회에서 1등.
그리고 오늘, 81타로 마무리된 라운딩이 2025년 골프의 ‘엔딩’으로 남을 것이다. 카너먼의 이론에 따르면, 오늘의 평온한 마무리는 내년의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저장될 것이다.
매번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고, 또 더 높은 목표를 세우는 패턴으로 일을 해왔다. 하지만 골프는 내게 다른 길을 가르쳐주었다. ‘힘을 빼야 공을 멀리 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스윙이 급할수록 샷이 무너진다’는 것을. 결국 스윙의 완성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균형이었다.
영국의 스포츠 심리학자 로버트 앨런(Robert Allen)은 “탁월한 선수와 평범한 선수의 차이는 기술보다 멘탈 회복력(mental resilience)에 있다”고 했다. 골프뿐 아니라 직장생활도 그렇다.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미스샷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다. 그것을 얼마나 빨리 회복하느냐가 진짜 실력이다. 그게 올해 마지막 라운드에서 내가 배운 가장 큰 교훈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골프를 하면서 일보다 더 솔직한 나를 만났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순간, 홀컵 앞에서 퍼터를 잡은 손이 떨리고, 미스샷 뒤에 혼잣말로 나를 위로하는 그 시간. 그것은 일상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순수한 나’였다. 팀원들에게는 냉철하고 공정해야 하는 팀장이지만, 필드 위의 나는 그저 불완전한 사람, 실수하는 사람, 그리고 배우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매년 이 시간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골프는 나에게 스코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였다. 함께 라운드한 멤버들, 웃음과 실수, 짧은 대화들이 쌓여서 회사 밖에서도 또 다른 신뢰를 쌓아갔다. 결국 골프는 일과 사람 사이의 완충지대였다. 조직에서는 치열하지만, 필드에서는 조금 더 인간적인 나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70대 싱글 스코어보다 중요한 건 즐기는 골프다. 실수한 샷도, 기가 막힌 버디도, 결국 한 라운드의 일부일 뿐이다. 올해 81타로 마무리한 내 골프처럼, 조금은 흔들리고, 조금은 불완전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 그리고 매 홀 새로 시작하는 마음이다.
“인생은 홀마다 새롭게 처음 티샷(Tee-off)하는 골프와 같다.”
어쩌면 그 말처럼, 나의 2026년도 또 하나의 새로운 라운드가 될 것이다.
굿바이 2025, 그리고 또 다른 첫 티샷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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