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는 언제나 배우는 사람이다.
어제 퇴근길, 지하철역에 내리자마자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 뭐 하고 있어?”
“엄마, 나 이제 산책 나가려고 준비 중이야.”
그 말이 무척 반가웠다.
“그래? 그럼, 지하철역으로 엄마 데리러 올래?”
“또?”
“오늘 회사에서 너무 힘들었어. 집까지 걸을 힘이 없어.”
딸은 웃으며 물었다.
“엄마, 오늘 또 직원 혼냈어? 그래서 마음이 불편한 거야?”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오늘은 반대야. 엄마가 혼났어.”
“엄마가? 왜?”
“보고서를 제대로 안 썼다고 상무님이 그러셨어.”
“엄마는 보고서 잘 쓰잖아.”
전화기 너머로, 사건의 전말을 궁금해하는 딸아이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오늘 실무 담당자랑 함께 보고드렸는데, 상무님이 기대했던 내용이 일부 빠져있었어.”
나는 팀장으로서 보고의 방향과 메시지를 잡고, 형식을 보완해 주는 일을 오래 해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임원 보고는 팀원이 직접 발표하더라도 큰 문제 없이 흘러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 직원이 상무님께 처음으로 보고하는 자리였고, 나는 의도적으로 보고서에 손을 덜 댔다.
‘이번엔 직원이 작성한 보고서로 가보자. 그래야 제대로 배운다.’
보고 전날 밤에 자료를 대폭 손볼 수도 있었지만, 논리의 연결이 약한 부분만 다듬고, 임원이 헷갈릴 만한 부분만 명확하게 수정했다. 그동안 나는 임원의 눈높이에 맞는 ‘완성된 보고서’를 만들곤 했다. 그 결과, 팀원들은 마무리 과정까지 팀장이 해 주는 걸 점점 당연하게 여겼고, 학습 속도도 그만큼 늦어졌다.
처음엔 다소 상처가 되더라도, 직접 부딪히는 경험이 결국 더 큰 성장을 만든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임원의 시간은 팀원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생각이 늘 앞섰기에 주저하며 시도하지 못했는데, 이번 결정은 나 자신에게도 작은 도전이었다.
작은 도전의 결말은 어떠했을까?
회의실에서 상무님이 보고서 첫 페이지를 넘기며 짓던 표정을 보는 순간, ‘아,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무님은 보고서의 형식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건 왜 이렇게 썼어요?”
비슷한 피드백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담당자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대응했고, 나도 옆에서 상무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보탰다.
그러나 상무님의 지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같은 지적('잔소리'로 읽는다)을 다섯 번쯤 듣고 나니 머릿속이 뿌옇게 되었다.
‘다음엔 잘해야지’ 하는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빨리 이 회의가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나도 팀원들에게 보고받을 때 이렇게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진 않을까?’
일이 잘되길 바라는 상사의 진심이 팀원에게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피로로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상무님을 보며 역으로 내 모습을 비추어 보게 되었다.
보고가 끝나고 회의실을 나서자, 담당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준비를 부족하게 했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상무님이 반복해서 말씀하신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오늘 질의 내용을 반영하면 훨씬 좋은 보고서가 될 거예요.”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다음엔 더 잘하겠습니다.”
상사에게는 지적을 받았지만, 팀원과는 오히려 라포(Rapport)가 형성되었다.
직원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상무님의 피드백은 꽤 거칠었다.
지적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적받은 팀원이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 다음엔 더 잘해야겠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그게 진짜 피드백이다.
리더십은 감정을 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리더가 부하직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줄 때 팀의 성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결국 보고서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보다, 신뢰와 배려로 팀원을 코칭하는 일이 더 큰 성과로 이어진다.
피드백의 목적은 잘못을 지적하는 데 있지 않고, 행동의 변화를 유도하는 데 있다.
‘이 의견을 반영하면 보고서가 더 좋아지겠구나’라는 확신을 주는 것, 그것이 진짜 피드백이다.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향하던 길,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는 딸과 마주쳤다.
“엄마, 오늘 힘들었지?”
그 한마디에 피식 웃음이 났다.
딸은 내 표정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상무님이 그냥 자기 스타일대로 말한 거잖아. 엄마는 엄마대로 잘하고 있는 거야.”
그 말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풀어줬다.
상사는 나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지 못했지만, 딸은 위로와 함께 ‘다음엔 더 잘해야겠다’는 자발적 동기를 일으켜 주었다.
나는 딸과 천천히 걸었다. 딸아이가 곁에 있다는 게, 그저 고마웠다.
보고서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이고, 사람을 세우는 건 언제나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걸,
오늘 또 한 번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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