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에게 하는 사과 01

키스와 엿

by 유당긴

“안녕”

재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sns 연락의 신호였다.

안녕이라는 말은 낯선 사람의 것, 친분 있는 사람이 보낼 법한 내용의 메시지는 아니다.

재인은 그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혹은 그 사람의 연락의 부재를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재인의 마음에는 더 이상의 공간이 없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재인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공간이 없었다고 표현할 수 있던 것인지, 혹은 재인의 마음이 어떤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공간이 없었다고 표현할 수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재인이 알고 있는 사실은, 그 안녕이라는 ‘너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 우리 대화를 해보자. 나에 대해 알려줄게’라는 무언의 신호에 답장을 하게 된다면, 그녀는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엿을 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재인은 연락의 상대인 진우에게 관심이 없었고, 다른 이를 마음에 품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그렇게 따뜻해진 마음속에서 첫사랑과의 재회가 부화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점철된 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재인이 진우와의 교류를 시작한다면, 자신의 손 안에서 철저하게 놀아나는 꼴을 보고 비웃기도 하며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는 그를 방관하는 최악의 광대놀이가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재인의 나름대로의 현명한 판단 때문에, 진우의 연락에 대한 답변은 진우에게 커다란 모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재인은 그 두 글자의 디엠을 이렇게까지나 과장되어 표현할 수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재인은 디엠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진우였다.

진우는 재인을 소개받고 싶다고 했던 재인보다 한 살 연상의 고등학생이었다. 재인은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모든 중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고등학생들의 직급과 교복과 그들을 괴롭히는 스트레스는 중학생들에게 그들의 권위로 비쳤다. 상대보다 나이가 많다는 위압감과 그로부터 새어 나오는 우월감, 고등학생들은 ‘위대’하다는 환상에 젖어있었던 나는 그로 인해 겁을 먹기도 했다. 너무 차이가 극심하다 싶은 존재는 때로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나는 내 스스로가 진정한 사랑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생각했고, 불과 몇 달 전에 남이 된 첫사랑의 얼굴이 다시 한번 상기 됐다. 진우는 재인이 다니던 중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고에 진학 중이었다. 그리고 첫사랑도, 그 남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의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둘의 고등학생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재인은 사랑스러운 미소를 가진 밝은 갈색 머리의 다정했던 첫사랑을 또 한 번 머릿속으로 꺼내놓고 말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 부질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리는 행동이 못할 짓이 되었다는 사실은 재인의 가슴을 또다시 짓이겨 놓았다. 비참하고 또 비참한 불운의 연속이었다.


재인은 한없이 고민했다. 사실 한없이라는 무한한의 개념의 시공간적인 숫자 개념을 쓸 만큼 거창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대충, 30분 정도 고민했다. 하지만 이팔청춘의 놀기 한창 바쁜 나이였던 16살에게 주어진 30분이라는 시간은 한없이 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랬다. 재인의 생각도, 행동도, 사고방식도 그녀는 모순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욕을 그야말로 ‘한없이’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인은 그녀가 모순으로 뒤덮인 존재에 가깝다는 사실을 꽤 빨리 자각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감추려고 부지런히 신중한 노력을 가했다. 16살부터 피곤한 인간관계의 연속의 시작점인 셈이다. 그리고 이를 풀어서 다시 써보자면 이것은 재인에게 타인으로부터 이런 모순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또 남을 속이고, 웃고, 속으로는 겉으로 보이는 감정과 정반대의 비웃음과 조소를 흘리는 상황의 과정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런 삶의 시작인 것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첫사랑의 소용돌이에 빠져나오기에는 그 소용돌이가 너무 재밌었다. 첫사랑의 여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소용돌이의 암울한 회색빛에 휩쓸려 하나의 우울으로 보이는 편이 애써 괜찮은 척 안 그래도 부족한 체력의 소모를 북돋우는 가식을 가시 세우는 것보다 이별의 상처에 훨씬 도움이 되었고 그래야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고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별의 미련은 재밌었지만, 의무감으로 꾸역꾸역 삼키는 셈이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재인은 모순적인 사람이었다.


재인은 그렇게 ‘한없이’ 고민한 끝에, 어렸을 적의 지난 보잘것없던 사회생활의 갈등을 통한 교훈을 되새기며 자신의 모순점을 타인에게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다 생각했고, 자신은 소용돌이에서 신나게 발길질하며 흥에 겨워 춤추고 있었으므로 그 연락은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편이, ‘악한’ 재인의 모습을 감추고 ‘예의 바른’ 그녀의 모습을 꺼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학생에게 고등학생으로부터의 호감은 중학생에 보기에 성숙한 연애를 의미하는 것 같았고, 재인에게 제 또래와 같은 아이 같은 연애와 성숙한 연애의 차이점은 누가 뭐래도 스킨십의 농도와 비례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순수한 호의에 부친 안녕이라는 간단한 안부인사는 멋 모르는 어리숙한 상대의 지능으로 ‘키스’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재인이 진우의 호의에 맞받아치는 것은 재인에게 아래와 같은 말과 같았다.

‘당신이 나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나를 생각한 다는 것을 알고 있지. 밤새도록 말이야! 그리고 나도 이제 당신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당신에게 키스할 거야.‘

그렇기에, 재인은 진우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사실도, 꽤 괜찮은 얼굴이었지만 굳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불쾌한 감정도 행동을 표현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기 때문에 무시했다. 단 하루 동안만 말이다.


다음날 제인의 머리와 몸은 따로 놀게 되었다. 한순간의 불안정한 변덕과 같았다. 재인은 지금 이 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영문모를 이 남자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면 그 비수는 삼국지 관우의 칼이 되어 술이 식기 전 베이는 적장의 목이 재인의 목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오래간만에 다시 한번 설렘을 느껴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고, 왜인지 모르게 한 살 연상의 멋-진 오빠에게 관심을 받는 것도 꽤나 폼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순이 아닌 변덕의 마음이었다. 재인은 모순적이고 변덕적인 사람이었다. 딱 그 나이대의 이팔청춘이 할 수 있는 배려 없고 변덕으로 뒤엉킨 자신이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그래봤자 고등학생이었을 뿐이지만)에게 먼저 연락 왔다는 자신감과 오만함의 절정이었다. 그래서 재인은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과 재미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 커다란 엿을 주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머리는 진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재인은 숨을 가다듬고 그녀는 심장이 말린 자두 장아찌처럼 조여지는 감정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내하며 진우에게 sns 연락으로 엿을 날렸다.


“안녕”


정말 사랑 없고 볼품없는 연애의 시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