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조용한 동네의 샤부샤부 맛집
비가 추적추적 꽤나 오는 어둑한 저녁이었다. 쌀쌀한 날씨로 으스스 해진 몸을 따뜻하게 덥히기 위해서 뜨근한 곰탕을 먹으러 가던 중 주차장이 넓고 간판이 큼직한 샤브폴스라는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결에 '샤부샤부는 어떤가요?' 입 밖으로 나온 말을 복숭아씨가 존중해 주어 곧장 샤브폴스로 목적지를 수정했다. 식당 주변은 원룸, 주택들로 이루어진 주택가였다. 그런 주택가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식당이었고 당당하게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큰 Hall이 두 개로 나누어져 있고 룸도 5-6개는 있었다. 우리는 안쪽 Hall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을 보니 샤부샤부와 화로구이 이 두 가지가 주 메뉴였고 해산물, 소고기, 월남쌈 등 나오는 재료에 따라 세부 메뉴로 나누어져 있었다. 고심 끝에 '월남쌈 쇠고기샤브(국내산한우)'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는데 곧장 테이블이 음식으로 세팅되었다.
딱 보기에도 신선해 보이는 버섯과 채소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섭취하면 장이 건강해질 것 같은 기대심리가 생겨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어렸을 때는 채소나 버섯을 보면 거부감이 먼저 들었는데 나이가 들 수록 오히려 채소나 버섯을 섭취하여 건강해지고 싶은 욕망에 선호감이 생겼다. 건강해지고 싶은 욕망이란 나이가 들 수록 점점 더 커지나 보다. 버섯과 채소의 상태는 손질한 지 오래 돼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주기적으로 재료 소진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장사가 잘 안 되는 식당의 경우 이런 채소나 버섯이 손님상에 나가지 않아 냉장고 냄새를 머금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식당은 그렇지 않았다.
샤부샤부 육수가 부어져 있는 전골냄비, 그리고 라이스페이퍼를 적시는 빨간 비트물이 담겨 있는 대접이 한상 가득 차려졌다. 먼저 육수를 맛있게 우려 내기 위해 서둘러 갖은 채소와 버섯들을 듬뿍 넣고 푹 끓이기 시작했다. 끓는 동안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따뜻한 붉은 비트물에 라이스페이퍼를 살짝 적신 다음 채소를 올려 소고기 없이 비건 스타일로 먹어보았다. 단순한 풀 맛에 거부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어 맛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하지만 고기가 빠지니 허전한 것이 공백이 확실히 느껴져 식사를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직 애피타이저의 느낌.
엄청 큼직한 원형으로 얇게 썰어져 나온 새빨간 소고기가 겹겹이 그릇에 올려져 나온 모습이 마치 거대한 페퍼로니를 연상시켰다. 강렬한 빨간 색감이 시선을 끌며 식욕을 자극했지만, 하얀 마블링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여 텁텁하진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요 근래 마지막으로 먹었던 샤부샤부는 집에서 배달로 시켜 먹은 것이었는데, 그때는 고기가 샤부샤부치곤 어느 정도 두께감 있어 씹는 식감이 아주 좋았다. 이 식당은 그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고기를 얇지만 큼직하게 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채소 육수가 보글보글 끓어 올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월남쌈을 개인의 Procedure에 맞춰 차곡차곡 싸기 시작했다. 비트물에 흐물해진 라이스페이퍼 위에 여러 가지 채소를 가득 올리고 육수에 살살 익힌 소고기를 간장소스에 찍은 뒤 조심스럽게 쌈을 싸서 먹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꾹꾹 쌈을 압축해서 먹으니 입에 넣자마자 입안 가득 채소의 아삭함과 고기 특유의 부드러움, 그리고 라이스페이퍼의 쫀듯한 식감이 삼위일체로 잘 어우러져 맛있었다. 소스의 종류는 간장, 칠리, 참깨 드레싱 3가지였고 채소 종류도 8가지가 되어 대략 24가지 경우의 수로 여러 가지 맛의 조합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었다. 다만 여유로운 식사를 원하는 복숭아씨에 비해 다양한 맛을 즐기려고 서둘러 급하게 쌈을 싸 먹는 나의 탐욕스러움이 과식이라는 화를 불러오긴 했다.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식사 속도를 조절해가며 뒤이어 칼국수와 죽을 먹을 준비를 하였다.
죽과 칼국수는 맨 처음 상이 차려질 때부터 나와있었다. 샤부샤부 월남쌈을 즐기는 동안 묵묵히 기다려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육수가 우려낼 대로 우려 져 보기에도 색이 짙어졌는데 거기다가 칼국수를 넣고 끓이니 면의 전분기로 인해 걸쭉해져서 국물이 너무 짜웠다. 하지만 면은 탱글탱글하게 잘 익어 입안으로 제 멋대로 후루룩 막 비집고 들어갔다. 이런 육중한 후식이 몸에 부담이 될 것은 알고 있었지만 K-후식이라는 악마의 속삭임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칼국수도 꾸역꾸역 다 먹고 마지막으로 죽을 만들었다. 걸쭉해진 국물에 간 불고기, 계란, 다진채소와 쌀밥을 넣고 뭉근하게 끓였다. 밥이 식당에서 나오는 공깃밥이어서 쌀알이 너무 살아있었다. 쌀알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가 되니 죽의 느낌보다는 걸쭉한 국밥 같았다. 국자로 쌀을 눌러 으깰까 생각했지만 쌀알이 너무 탱탱해서 빠르게 포기했다. 간 불고기는 불고기피자 토핑 맛과 99% 똑같아 달달한 것이 너무 상업적인 맛이 강해 거부감이 컸다. 배도 터질 듯 부르고 죽의 맛이 별로여서 죽은 남긴 채 자리를 일어섰다.
샤부샤부는 음식의 특성상 긴 시간 천천히 먹어야 하는 요리이다. 혼자 즐기기에는 그 시간이 적적해질 정도로 너무 길어 적절하지 않은 메뉴이다. 반면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정겹게 먹기에 아주 적절한 메뉴인 것 같다. 그렇게 여럿이서 샤부샤부를 여유 있게 즐겨야 샤부샤부의 진가를 완전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굶줄인 짐승 마냥 허접지겁 배를 채우기 급급했던 샤부샤부에 대한 나의 태도가 부끄러웠고 깊은 반성을 하게 된 식사였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