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멸치쌈밥 맛집
봄이 한 걸음 훌쩍 다가왔다는 게 느껴지기 시작한 요즘. 겨우내 우중충한 마음을 단번에 박살 내버리고 싶었던 나머지 남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대구에서 남해까지 200km가 넘지 않는 거리지만 막상 남해에 도착하니 봄 내음이 양껏 느껴졌다.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 그리고 푸릇푸릇 해지기 시작하는 들녘을 바라보니 꽁꽁 얼었던 내 마음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점심이 시작될 무렵 남해에 도착했었는데, 이곳저곳 돌아다니기에 앞서 식사를 든든하게 하기로 했다. 마침 남해로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멸치쌈밥 거리가 있었고 필자가 작년 여름에 방문했었던 우리식당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하였다. 일요일이었지만 11시 다소 이른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가게 안이 북적북적하진 않았다. 다만 전체 자리의 5할은 넘을 5-6 팀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한두 팀씩 식당으로 들어섰는데 식사가 끝나갈 때 즈음 어느새 자리가 만석이 되었다. 식당의 유명세는 벽면에 붙어있는 손님들의 사인과 글귀로 알아볼 수 있었다. 어찌나 많던지 사방팔방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두리번두리번하고 있으니 곧바로 음식들이 나왔다.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밑반찬은 "남해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며 환영이라도 하듯 미역과 멸치, 시금치 등 남해 특산물로 만든 반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보물초라고 불리는 봄의 정기를 듬뿍 담긴 남해 시금치는 특유의 달달한 맛이 일품이어서 한 번 더 리필하였다. 식당 사장님의 연륜을 반찬으로 표현한 듯 아주 시큼하게 푹 익은 묵은지의 강한 맛도 기억에 남았다. 밑반찬은 요 정도. 우리는 본격적으로 메인 요리를 맛보았다.
멸치쌈밥에는 초심자인 씨를 배려해서 혹시나 입맛에 맞지 않더라고 식사를 든든하게 할 수 있도록 보증된 밥도둑 갈치구이를 주문하였다. 평소 뼈를 잘 바르기 때문에 자신 있게 뼈를 바르기 시작했다. 먼저 세심한 젓가락 질로 양쪽 가생이 뼈를 살살 발가 낸 다음 가운데 두꺼운 척추뼈를 중심으로 반을 가르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평소처럼 잘되지 않았다. 자꾸 부스러지거나 잘 나누어지지 않아서 약간 당황스러웠는데 한 입맛을 보니 그 이유를 대번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갈치가 완전히 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갈치 살이 아주 부들부들한 것 이 입에 넣자마자 녹아 없어질 듯한 여린 식감이었다. 거기다가 생물 갈치 특유의 촉촉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포슬포슬 찰진 쌀밥을 먹는 듯 따뜻함이 느껴졌다. 식감은 좋았지만 나에게는 약간 덜 익은 것이 별로였다. 일단 회도 아닌 것이 구이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피가 살짝 보이니 마치 덜 익은 치킨을 먹는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신선한 갈치여서 그런지 비린 맛은 없어서 밥과 함께 남김없이 맛있게 먹었다. 1/4조각은 재(닥스훈트. 7세)에게 양보했지만. 아무튼 씨는 본인 입맛에는 좋았다는데 그래도 덜 익은 것에는 호감 가지 않기에 익기 정도를 손님의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의견을 내주셨고 필자도 격히 공감하였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인 멸치쌈밥을 맛보았다. 큼직한 죽방멸치가 우거지와 함께 통째로 푹 익혀져 나와 쌍추에 밥과 우거지 그리고 멸치를 올려 쌈 싸 먹는 방식이었다. 나는 먼저 멸치 통째로 본연의 맛을 맛보았다. 멸치 중에서는 가장 큰 축에 속하지만 다른 생선에 비교하자면 가장 작은 축에 속했기 때문에 이 멸치는 나에게 참신한 재료였다. 멸치 하면 마른 사람을 비유하는 생선이지만 죽방렴 멸치는 큼직해서 멸치의 순살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첫 번째로 신선했고, 다른 생선과는 다르게 그 살이 너무 적어 아껴서 조심스럽게 맛봐야 하는 점이 두 번째로 신선했다. 다음으로 하이라이트와 다름없는 국물을 맛보았다. 먹자마자 드는 생각은 '와.. 간간하다!'였고 뒤이어 '와! 시원하다!'였다. 국물에 재료로부터 우려져 나온 깊은 맛들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어 꽉꽉 차있는 맛이지만 전혀 부담스러움이 없었다. 오히려 멸치 특유의 시원한 맛 때문에 계속해서 손이 갔다. 갈치구이 껍질에 붙어있던 왕소금은 생선의 기름이 듬뿍 배여 감칠맛이 폭발해서 맛은 있었지만 너무 짜서 손이 가기에는 멈칫했지만, 멸치쌈밥의 국물은 말 그대로 마성의 국물이었다. 나는 밥보다는 멸치 본연의 맛에 집중하기 위해 쌈에 멸치와 우거지만 넣고 심플하게 식사를 했다. 반면 멸치만 먹기에는 아직 부담스러웠던 씨는 밥과 함께 즐기셨는데 간간한 짠맛 때문인지 공깃밥 하나를 다 해치우셨다. 하지만 멸치가 아직 몇 마리 남아 있었던 지라 밥 딱 한 숟가락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 하셨는데 공교롭게도 나도 이미 공깃밥 한 그릇 뚝딱해버린 상태였다. 한 그릇을 더 시키자니 과한 것 같고, 이런 상황이 답답했는지 씨는 일하시는 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그러니 그분께서 공깃밥 한 그릇을 들고 나와 어차피 자기도 이제 곧 식사를 하려고 했다며 한 숟가락만 퍼가면 남은 거 자기가 먹겠다 하셨다. 이런 분이 바로 선인이 아닐까. 혜자스러움에 경탄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욕심 없이 딱 한 숟가락 떠 식사를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처음 왔을 때 느꼈던 맛에 대한 감탄은 어느새 익숙함으로 변해 무뎌졌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다시 방문하여 맛을 보니 새삼스러웠다. 더군다나 특유의 향토적인 맛과 시골의 온정이 있으니 여행자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식당이었다. 갈치구이의 익은 정도라든지 묵은지의 지나친 쿰쿰함 등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은 있었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나에게 맞춘 다는 것은 욕심이지 않을까. 겸손한 마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 긴 것 같다. 이 정도로 유명한 집인가? 의문점이 생겼을 때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소주 한 잔에 반주 삼아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 답을 얻었다. 요즘 트렌드에 걸맞은 instargramable한 식당을 찾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식당이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속담이 진리는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촌스럽지만 정겨운 맛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추천하는 맛집.
과거로부터의 맛이랄까
내 맘속에 영원히..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