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야독이에요

특수대학원을 다니며 행복했어요

by 느린날들

산틋한 하루다. 어제는 작품 설치날, 직장 상사분에게 하도 털려서 기운이 쪽 빠진 채로 저녁에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다. 주경야독의 실사판이나 다를 바 없었다. 수업은 예상보다 이르게 마쳤다. 어떤 원우분이 교수님, 비도 오는데 막걸리 한 잔 하러 가시죠라는 용기있는 한마디를 기점으로 교수님께서는 난 맥주판데, 하면서 웃음꽃이 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수님 맥주를 정말 잘 드신다.


대략 열 명이 좀 안되는 인원이었기에 길게 테이블을 연결하여 자리에 앉았다. 화장실에 들렀다 가느라 공석인 자리가 교수님의 앞자리 뿐이었다. 허허, 좋다고 웃으며 앉았다.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과 마주앉아 맥주를 마시는 일은 초등학생이 만화 속 캐릭터와 초코우유를 마시는 일이나 다를 바 없는 기쁜 일이었다. 처음에는 자꾸만 교수님과 눈이 마주쳐서-사실 화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의 습관 때문이긴 하지만-시선처리를 하느라 안주 대신 애를 많이 먹었다.


약간의 어색함과 긴장은 맥주 두어 잔에 금세 풀렸다. 교수님은 따스한 목소리와 편안한 표정으로 원우들에게 커리어패스와 목표를 물어보셨다. 내 차례가 오겠거니, 하고 마음 속에서 드릴 말씀들을 가다듬었다. 시나리오만 쓸 줄 알고 진학했던 영화과 진학과, 어영부영 영화는 한 편 연출했다는 것, 그리고 영화 연출 전공이 전시 기획과 맥락 상 비슷한 면모가 있었다고 말씀 드렸다. 교수님 따님분이 아마 나의 나이 또래일 것으로 유추되고, 영화를 전공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교수님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 눈치셨다.


교수님께 말씀을 드리는 와중에 옆에 자리한 친한 원우분이 나를 보며 교수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몇 숟갈 얹어주었다.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만 자리하시는 줄 알았던 교수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셨다. 나는 좋네요, 하고 웃어주셔서 맥주가 초코우유나 다를 바 없이 달게 느껴졌다.


이모저모 듣는 것도 좋았지만, 2년 간 파편적으로라도 교수님을 뵈었던 일, 능력있는 사람의 표본, 인간적인 면모, 학생을 핸들링하시는 방식 등을 보고 배울 수 있어서 무척 기쁜 학업이었다. 한 번은 50대 남성분이 화가 나신 채로 교수님께 말대응을 하신 날이 있었는데, 온화하게 누르시는 그 모습이 인상이 깊었던 것 같다. 조곤히 그렇지만 꾹꾹 담아 인사이트를 던져주시는, 내가 생각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나의 오육십대를 상상해보면 표정을 짓지 않아도 온화한 느낌을 풍기는 단단한 할줌마가 되어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누군가를 지도하는 일, 간단한 몇 마디에도 단단한 내공이 담긴 일, 지금의 미시적인 관점이 아닌 맥락을 읽을 줄 아는 거시적인 시선들을 갖고 싶다. 지금부터 연습해본다.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문맥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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