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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나폐인 Sep 24. 2022

사명(使命)과 처세(處世)

술術, 계計, 략略, 모謀

 "기꺼이 했다. 모든 일을"


 초등학교 시절 삐걱대는 목재 마룻바닥 교실에 손에 가시가 박히도록 왁스 걸레질을 할 때도,  조개탄, 목탄 난로 당번을 일 년 내내 도맡아 할 때도, 서△우유를 매일 교실에 나르는 우유 당번을 할 때도 그랬다. 난로의 조개탄과 석탄을 넣어 불을 붙이고, 재를 치우고 나르는 일-그 뜨거운 목탄난로를 물 부어가며 끄고 했다는 게 요즘 같으면 4학년에게 맞길 일인가 싶지만-을 기꺼이 했다. 어린 마음에도 당번의 업무가 그렇다면 그 업무를 충실히 완료하고자 했나 보다.


 군시절 모든 병과兵科 훈련은 정석대로 했다. 구보는 요령을 피우지 않았고, 보급품 외 물품은 사용하지 않았다. 위병소에서 근무할 때는 잠자지 않고 위병근무를 섰고, 군복을 입고 부대 문을 나설 때는 거리에 침조차 뱉지 않았다. 매번의 식사를 잔반을 남기지 않고 모두-물론 먹을만해서-먹었다. 전역 전날 밤까지 마지막 훈련을 마쳤다. 군인으로서 맡은 바 직분을 완수하고자 했다. 당장 전쟁을 대비한다는 역할에 대해 생각하며 군생활을 했다.


 입사한 이후에는 8 to 6는 반드시 지켰다. 근무시간에는 가능한 개인 업무-아이 문제로의 긴급한 연락 등등은 예외로-는 하지 않았다. 맡은 업무가 밀리거나, 완료되지 않을 경우 가능한 완료하기 위해 다른 시간을 아꼈다. 점심 휴게시간 이외에는 주식이나, 쇼핑, 잡담 등을 하지 않았다. 커피 한잔 마시러 나가자는 동기들의 연락에도 일과시간 중에는 가능한 참석이 어렵다는 점을 말했다. 취업규칙에 적힌 근로자의 의무를 다하며 내가 받을 급여와 권리를 정당히 받고자 했다. 결과일까? 


 "처세에 실패했다"


통상의 삶의 방식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분명 나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정해진 바에 따라 행동하고자 했을 뿐인데,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학생이, 당번이, 군인이, 직업인이 가져야 할 마땅한 가치관과 행동에 대해서 그대로 했을 뿐인데 나는 일종의 '별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일종의 '처세'를 잘 못한 한 것일까. 내가 처處한 세世상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할까. 이것을 우리는 쉽게 '부적응'이라고 한다. 맞다. 적응과 부적응을 나누자면 부적응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은 자리의 역할에 충실하려 했던 것 같다. 일종의 사명감-거창한 사명감은 아니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처세'에 실패했다. 사실 처세란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법도일 뿐이니, 모두에게 각자의 방식과 관점으로 존재한다. 다만, 처세가 일반성을 띄게 될 때. 우리는 처세한 글자를 더 붙인다.


"처세술術"


 분명 난 처세술이 부족했고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처세가 어찌 한낮 기술이 될 수 있을까? 세상에 임하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기술이 있다니. 결국, 모든 목적을 위한 행동이 처세술이다.


술術은 재주다. 사람을 대하는 순간,  관계를 대하는 순간이 모든 술법의 장이 되는 것이다. 상사에게 티 나지 않게 잘 보이는 법도 재주요. 적당한 웃음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재주요. 상대를 몰래 기만하는 것도 재주다.


 재주가 부족하면 처세에서 뒤처지는 것이니 열심히 갈고닦아야 할 것이 마땅할 것이고,  각종 처세술 관련 자기 계발서가 넘쳐난다. 고전에서도 처세술을 배우고 때로는 인문학에서도 술법들을 찾고 배운다. 물경, 현대인-한중일-의 필수 덕목으로 자리 잡았달까?


"사명은 원형이요 본질이다"

 

 그에 비해 사명은 원형이고 본질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기준이다. 술법에 비하면 사명은 단순하고 차이가 없다. 그래서 사명은 수단이 될 수 없다. 술법과 달리 목적으로 향하는 여정 속의 , 그 자체일 따름이다.


 때때로-그리고 아주 자주-각종 술법은 종국에는 모략으로 또는 간계로 변질되기도 하고,  적당한 이미지의 계략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상대에 향하는 계計, 략略, 모謀는 모두 상대가 모르게 하는 일종의 기만을 기본으로 한다. 상사를 대하는 처세술이 눈에 띈다면 아첨이 되는 것처럼.


 "처세술과 관련한 인문학적 접근을 저어할 필요가 있다"


 술법이 장려되는 사회는 신뢰를 상실한다. 길이 없는 도로에서 서로가 길을 내며 다른 길을 잘라낸다.  일과 수십 분을 잡담, 웹서핑에 쏟다가도 회사를 비난하고, 적당히 포장된 일처리로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한다.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거둔다면 그 얼마나 뛰어난 처세술이란 말인가. 이때 원만한 상하관계의 처세가 곁들여진다.


 같은 의미로 난 삼국지를 싫어한다. 완독을 하긴 했다. 다만 재독再讀 삼독의 의미는 찾지 못했다. 삼국지는 처세술이 장려되는 사회-주로 한중일-의 처세 바이블로 불러도 무방하다.  일종의 술術, 계計, 략略, 모謀의 집합체로서, 삼국연의에서 정사正史를 들어낸다면 그 바닥에 남는 것은 온갖 기만 술책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바닷물을 끊이면 소금이 남듯이.(삼국지의 문학적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으로서 의식에 미치는 영향 측면에서)


 그 보단 재 삼독을 한 수호전을 좋아했다. 온갖 비인간적이고 폭력적 묘사를 소설적 장치로만 여겨 날려버릴 수 있다면 술수 대신 우직한 사명감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처세술이 각광받는다. 그리고 처세의 답을 위와 같이 고전 속에서 찾을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 마치 인간사 처세의 기본 인양 인정돼버리는 것을 저어해야 한다. 아무리 고전에 있어도 그건 술법이지 본질은 아니다.


 "사명이 존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


적어도 보이는 영역에서라도 본질에 충실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 술모계략에 의한 세상살이가 권장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이미 우리의 세상이라 해도 더 이상 권장되지 않길 바란다. 마치 다크나이트에서 하비덴트의 고개를 돌려놓듯이 말이다.


 그보단 사명이 존중받고 칭송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경찰관 소방관은 시민의 옆에서 선생은 학생의 마음에서, 학생은 배움의 자세에서,   의사는 환자의 숨 속에서 존재하고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적어도 가르치고 읽히고 공유하는 가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인간이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이 바로 기만欺瞞인데 하물며 배우기까지야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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