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개
맛보단 확률로 선택하는 한국인의 소울 푸드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식사를 하러, 길을 나섭니다. "오늘은 뭐 먹으러 갈까?"라는 선배 사원의 질문에도, 점심 메뉴는 무엇이 될지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는 예상되는 메뉴이기 때문이겠죠? 김치, 부대, 된장, 생태 등 00집이 될 확률이 50%는 넘습니다. 네 맞습니다. 한국사람 영혼의 음식, 찌개입니다.
제게는 찌개만큼 애매한 음식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국물을 조금만 자작하게 잡으면 찜 또는 조림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무색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국물이나 양념 만을 특징으로 본다면 좀 부족합니다. 닭도리탕은 찌개와 유사한 모양새지만 탕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하물며 탕보다는 찌개에 가까운데도 말입니다. 동태탕은 동태찌개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판매용으로 나설 때는 웬만하면 찌개라고 붙이지 않습니다. 끓여서 먹기도 하고 끓이면서 먹기도 하는 점에서 전골류와도 많은 교집합을 이룹니다. 찌개란 녀석은 참으로 애매모호한 음식입니다.
조리하는 식기 역시 다양합니다. 전골냄비에 자작하게 끓이는가 하면 국, 탕에 쓰일만한 법랑 냄비에 끓이기도 합니다. 물론 뭐니 뭐니 해도 찌개의 대명사는 양은냄비이죠. 때로는 양은냄비 사랑이 넘치다 못해 식기가 아닌 것까지 사용하기도 합니다. "진짜 세숫대야 김치찌개"라고 걸고 장사를 해도 장사가 잘되기도 합니다. 할머니 뼈해장국에 할머니 뼈는 없어도 세숫대야 찌개 집은 정말 세숫대야가 있습니다. 증명이라도 하듯 손잡이가 없어서 아예 집게로 양손 가득 들고 나오기도 하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찌개 집에 가면 하나같이 빨간 국물이 한소끔 끓은 채로 버너로 옮겨집니다. 부르는 이름이 어찌 되었든 찌개라는 녀석의 공통분모, 일종의 필요조건은 "매운 양념을 팔팔 끓이는 국물"이라는 점은 명확합니다.
찌개는 재료보다는 간에 집중한 음식입니다. 재료를 많이 먹을라 치면 그에 비례하는 양념을 먹어야만 합니다. 웬만한 밥의 양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사실상 밥의 양이 적은 사람들은 찌개의 경우 본전 찾기 힘든 음식이겠습니다. 큰돈 주고 뷔페에 간들 못 먹으면 허사인 것처럼, 저렴한 찌개 집에서도 본전을 못 찾는 사람이 나오기 부지기수입니다. 맵고 강한 국물 몇 숟가락이면 사실상 밥 한 공기는 뚝딱할 만한 양념이죠.
이쯤 되면, 밥에 찌개를 곁들이는지 찌개에 밥을 얹어먹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사실상 밥상의 조연이어야 하는 찌개가 주연이 되다 보니, 필연적으로 과한 짠맛을 섭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매일 조연급 배우를 주인공으로 하는 밥상을 감상하고 오는 관객(접니다)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습니다.
찌개 밥상은 찌개라는 이름처럼 애매한 것 같습니다. 찌개의 어원이 정확 치는 않지만 지진다는 "찌"에 접미사 "개"가 붙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더 그렇지요. 묽게 끓이면 국이라 불러도 무방하고, 끓이면서 먹으면 전골이라 불러도 역시 무방하고, 더 끓여서 먹으면 짜글이라 부르는 변종이 탄생하며, 아예 졸이면 찜이나 조림이 되는 음식입니다. 회사 앞의 된장찌개 집은 아예 밥에 비벼먹으라고 찌개를 끓여줍니다. 자작하게 끓인 된장 짜글이나 덜 짠 강된장 수준의 것에도 찌개를 붙이면 찌개가 됩니다. 스펙트럼이 무궁무진한 음식이죠.
각설하고, 왜 점심시간에 찌개를 먹으러 가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사실 딱히 생각나서 간 적은 별로 없기 때문인데요. 한식 위주의 식단을 선호하는 사람들조차도 건강한 한식을 먹자고 한다면, 밑반찬이 풍성한 밥집을 찾아가지 찌개 일변도의 식당을 선호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찾은 답은 이겁니다. 개인의 취향과 선호의 교집합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성된 집단의 교집합을 도출해 내야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적을(것으로 생각하는) 메뉴"
제가 생각하는 직장인 점심메뉴 찌개의 본질입니다. 일단 주연이 될 수 없는 음식이므로 밥과 반찬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라면사리의 추가나 계란말이의 추가 등으로 보완합니다. 찌개는 양념이 본질이라고 했던 것처럼 맵고 짠맛의 양념이 재료를 틀어쥐고 있는 음식입니다. 한국적인 매운 양념에 대한 선호는 불호보다는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택되죠. "그냥 김치찌개나 먹으러 가자."
결국 찌개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양한 맛과 재료의 스펙트럼에서 비교적 클레임이 덜할 수 있는 선택인 것은 아닐까요? 개인의 음식 취향 선택이 제한된 상황에서 도출되는 최적의 대안이 찌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요즘은 점심시간에도 본인 취향껏 밥을 먹고자 하는 친구들이 늘어서 찌개 일변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치들은 별도로 먹으러 가는 바람에 남는 사람은 여전히 찌개냐 국밥이냐를 논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또 어떤 찌개를 먹을지, 찌개거리를 찾아서 찌개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수많은 직장인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해봅니다. 찌개는 개인적으로는 친밀한 가족의 밥상에 어울리는 조연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