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열어 글자를 뱉다
최근 심심(甚深)한 사과 논란이 벌어졌을 때,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로웠습니다. 단편적으로는 디지털 문맹이니, 신문맹이니 하는 한자어에 대한 몰이해(沒理解) 부분이겠으나 이는 한낮 가십거리에 불과한 것이겠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심심한'이라는 한자어를 사과에 선택한 그 이유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가슴 깊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진심으로 잘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위 4가지 말은 말이 담은 문맥상 내용은 동일하나, 그 어감이나 발화자의 의도는 듣는 이로 하여금 천차만별로 느껴지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입을 열되 말을 하지 않고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자어로 된 단어는 구어체라기보다는 오늘날에는 문어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굳이 사과의 발화를 하며, 문어체를 선택하는 것은 감정을 실어 보내기 어렵습니다.
1) 구어체 발화 : 가슴 깊이 잘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감정, 표정이 들어가 있거나 확인됨)
2) 문어체 발화 :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별다른 감정의 표현이 불필요함)
사람이 본디 그러합니다. 진정한 사과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감정의 소비를 하고 싶어 하지 않지요. 사과는 해야 하지만 도저히 사과할 마음이 온전히 생기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자 뒤에 숨어서 입을 열어 글자를 쓰면 됩니다. (그 누구도 '심심한 사과'를 발음하며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심~심~한 사과...를 하지는 않지요. 그저 심/심/한 사과를 할 뿐입니다)
대표적 예가 정치인들의 사과지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는 오히려 양반입니다. 전혀 사과로 들리지 않고 외교적 술사로서나 쓰일 법한 '유감(遺憾)'은 한 술 더 뜹니다. 종종 본인의 과오나 잘못에 대해서 '깊은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글자를 뱉는 사람들을 보면,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이라고 지적한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남은 것일까요, 아니면 본인의 자아에 대한 깊은 반감이 남은 것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심이 통하는 사과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공개적인 혹은 중요한 사과를 함에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하고 말을 준비했겠지요. 그 생각의 결과가 항상 심심한 사과 거나 유감의 말씀을 드리는 정도라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심심한 사과라고 들립니다.
글로 써서 전하는 것은 당연히 상관없습니다만, 사람의 말이란 게 기계가 아닌 이상 감정이 담겨 살아 있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구술 과정 중의 문어체 발화는 글자 뒤에 숨어 사과의 수고를 덜어내려는 알량한 마음으로 보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