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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나폐인 Sep 15. 2022

평등의 조건


chapter 1  평등


 불평등하다고 여긴다면, 어떤 이유 때문일까? 먼저 '평등'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하고 가야 합니다. 여러 사전적 정의와 사회과학자의 견해가 있겠으나, 딱 한 줄로 언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겠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제11조]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이하 생략)


 적어도 헌법에 의하면, 누구도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하며,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헌법에 따른 평등에 대한 조항이니,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평등이 되겠죠. 우리 사회는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이 없고, 계급구조가 없는 정말 헌법에 따른 평등한 나라인가요?


 "사회적 신분이란 무엇인가?"


 법리적 견해에 따라 많은 해석이 존재하겠지만, 선천/후천적 신분은 물론 존비속 관계에서의 신분 역시 사회적 신분을 폭넓게 인정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법리를 떠나 문화, 통속에서 본다면 사회적 신분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지위(서열)을 사전적으로 결정짓는 모든 frame이 될 수 있을 것.


 결국 우리 사회가 평등한가를 따져보는 시작과 끝은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이고 모든 이에게 공감되는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차별적 대우를 받지 않아야 않아야 한다."


 평등의 조건이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글을 읽은 모두는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매 순간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있다면 어떨까요? 적어도 헌법 제11조에서 말하는 평등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랄까.


chapter 2  생각의 도구


 "무지개의 색을 모두 말해보세요"


 빨주노초파남보. 맞습니다.  하지만 다음 질문은?


 "조선시대 무지개는 몇 가지 색으로 불렀을까요? 그럼 과거 이슬람 국가에서는 어떨까요?"


 조선시대 무지개는 당시 통용되던 '흑백청홍황(黑白靑紅黃)'을 체계를 차용하여 5색 무지개라 불렀습니다. 미국에서는 과거 6 색깔 무지개라고 불렸기도 했고요. 이슬람 문화 등 다른 문화권에서는 2~4색 무지개 등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틀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프리즘을 통과시키면 200여 개도 넘는 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무지개 사진을 다 찾아봐도 제 눈에는 7가지 색이 선명히 보입니다. 머릿속으로야 여러 색이 충분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지만 말입니다.


 [ 《1984》의 사회는 기술독재를 기반으로 현대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이 도달하게 될 종말을 기묘하게 묘사한 근미래 소설이다. 국가는 영어를 바탕으로 신어(Newspeak, 新語)라는 사상통제용 언어를 새로 만들어 사람들이 당의 방침에 대한 어떠한 의문도 가지지 못하게 한다. 이전의 언어는 구어(oldspeak)라고 하여 점차 사용 빈도수를 줄이며 사어(死語)화시킨다. ]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조지오웰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 1984에는 전체주의의 종말을 묘사하며, 특이한 설정을 한 가지 넣습니다. 바로 '신어'라는 설정인데,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과 그 맥락을 같이합니다. 당에 반대하는 모든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아예 언어를 바꿔버리는 것이죠. 신어 속에서는 free는 더 이상 polically free와 같은 용례는 사라지고 오직 This dog is free from lice와 같은 용례만 허용됩니다.


 물론 언어학이나 인지학적인 측면에서 반론도 많을 것입니다. 가령, 유명한 이누이트의 눈에 대한 명사의 숫자는 다양한 색감과 질감의 눈을 경험하는 환경이 언어에 투영된 것이지, 언어가 세분화되어 눈을 그렇게 인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대표적이겠습니다.


 하지만, 무지개를 7 색깔로 말하고 살색이라는 크레파스를 차별적 언어로서 더 이상 사용하지 말자고 하는 것을 보면 언어와 생각은 적어도 상호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눈으로 보지만, 눈에 비친 세상을 무엇으로 '생각'하고 살아갈까요?

 


chapter 3  기울어진 운동장


초등학교 때 부반장을 한번 해본 적 있습니다. 전 학년 학급회의 참석해서 간부학생들끼리 회의를 진행하는 자리에서, 향후 학급회의의 진행을 위한 제언을 해보라는 선생님의 요구에 손을 들었습니다.


 "학급회의 시간에는 호칭 생략하고 모두 반말을 하거나, 모두 상호 경어를 사용했으면 합니다"

 * 경어라는 표현을 썼는지, 어린 시절을 고려하면 '높임말'이라고 했는지 정확치는 않다.


 까마득한 4학년 꼬맹이가 하늘 같은 6학년 선배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말은 적잖은 웃음과 함께 그대로 묻혀버렸겠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전 언어 표현에 민감했나 봅니다. 왜 누구는 반말을 하고 누구는 존댓말을 해야 하는가, 평등한 의사진행은 평등한 언어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은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한국 사회에 강하게 남아 있는 차별과 억압의 근본적 원인은 '존댓말'과 '반말'로 이루어진 '존비어(尊卑語) 체계'에 있습니다. 이것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민주화가 불가능합니다."]


 위 이야기는 제가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매우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적어봅니다. 2005년 당시 최봉영 한국항공대 교수가 신문 기사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우리사회의 평등에 대한 근원을 생각해볼 때, 저는 이 기사의 멘트가 항상 와닿았습니다.


 예의범절의 순기능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존비어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는 운동장을 기울어지게 하는 존비어와 운동장 전체를 복토하듯 올리는 '존중어_경어'의 사용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매 순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고 있습니다. 판사, 검사, 의사 등은 물론 길 가다 만난 한 학년 위 선배에게까지 반말을 듣게 되는 것이 우리말의 현재입니다.


 연장자에게 높임말을 하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냐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의사가 반말을 하고 환자가 존댓말을 하는 것은 어떤가요? 전자는 당연하고 후자는 무례한가요? 그럼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살도 존대의 가치가 정말 있나요?


 본질은 우리말의 존비어는 근대화를 거치며 왜곡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친소어로 존재해야 하는 반말과 존중어로 존재해야 하는 경어가 과거 신분제/계급제 사회에서 명확한 신분간에 사용되었던 존어/비어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친해서 하는 반말과 하대하는 반말이 같고, 매너의 존댓말과 1살이라도 많으면 해야 하는 존댓말이 같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정말 없나요? 그렇다면, 평등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의사표현의 평등은 잘 실현되고는 있나요?


chapter 4  평등의 필요조건 _ 상호 동일어 사용


 직장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늘 제대로된 회의를 해보자고 되뇌지만 공염불에 그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 배경에는 단언컨대 많은 비율로 존비어가 자리 잡습니다.


 "부장님 제 의견을 말씀드려봐도 괜찮을...(까요?)"

"내 말은...!"


 이미 기울어져 있는 언어의 운동장에서 평등한 의사표현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상위 서열자에게 닿도록 공을 차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죠. 그 반대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건 우리가 말해야 하는 음절의 숫자와 일치하기도 합니다. 존비어 문화에서 존어는 항상 비어보다 음절수가 길죠. 그만큼 비효율적이고 에너지 소모적이며, 어렵습니다. 동물조차 하위서열의 행동이 훨씬 더 많고 복잡하죠.


 "1~10초까지 세어보세요. 단, 세는 동안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아 보세요"


 아마 대부분 코끼리를 잠시라도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 뇌는 대부분 무의식의 영역에서 사고하고 작동하기 때문이죠. 프레임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언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역사적이며, 반감 없이 사용되는' 프레임입니다.


 일평생 존비어 체계에서 살아가고, 말을 하며, 생각하는 우리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평등을 원하는 당장의 우리조차 전화상담원의 느린 응대에는 어떻게 반응하고 싶어 지나요?


 "당신 내리세요! 비행기 못 띄웁니다"


 저 멘트는 땅콩회항의 그분이 언급한 멘트이나, 조금 다릅니다. 왠지, 저렇게 이야기했으면 갑질 논란은 덜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역사적 이유에서 대부분 비롯되었든 간에 그 옆에는 반드시 존비어 문화가 한몫을 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신분이 없는 사회를 살아가나요?  존비어에 의한 신분을 없애기 위해, 평등을 위한 필요조건, 반말을 없애고 모두에게 평등어를 선물하자.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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