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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나폐인 Sep 17. 2022

주연보다 나은 조연

 뭘 먹을지 떠오르지 않을 때, 일단 밥을 안쳐 놓고 그 사이에 냉장고 문을 연다. 어떤 반찬이 있는지, 어떤 재료가 있는지 생각해보면 별다를 건 없는 메뉴밖에 남지 않는다는 걸 늘 실감한다. 다만, 그때 밥솥 위로 하얗게 올라오는 김과 함께 식욕이 올라와줘 고맙다.


 밥은 그 자체로 요리가 되지는 못한다. 주연이 되지도 못한다. 항상 반찬이라는 존재에 기대어 반찬의 모든 맛을 담아 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하지만, 일상의 내 밥상은 반찬이 그리 풍족하지 않은데 그때에는 밥이 주인공이 되는 은혜를 베풀어준다. 그래서 난 가능한 시간이 있다면 밥은 직접 지어먹으려고 한다.


 취사 완료를 알리는 알람 소리와 함께 즉시 밥 솥의 뚜껑을 열어젖히면, 하얀 김을 잠시 감상하며 밥의 향을 느낄 수 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밥의 향기 뒤에는 반짝이는 밥알들이 기다린다. 그 즉시 밥을 조심스레 뒤적여 줘야 한다. 미압(米押 _쌀알의 압력)에 밥알이 금세 한 덩이 백설기처럼 굳어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밥을 짓고 뚜껑을 즉시 열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백설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게다.


 갓 지은 밥을 옳게 대접했다면, 밥은 당신의 하찮은 반찬을 한층 맛있게 변모시킨다. 밥의 맛은 잘 익은 쌀의 맛이고, 그 맛은 단맛을 기본으로 한다. 잘 지은 밥은 집 앞 제법 가격 비싼 빵집의 빵처럼 촉촉하고 단맛이 돈다. 맛있는 빵일수록 버터와 설탕이 듬뿍 들어가지만, 밥은 물만 잘 넣어주면 그만이다.


 밥의 단맛은 우리 반찬의 기본적인 짠맛을 잘 받쳐 준다. 단짠의 공식을 완성해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되어 준다. 갓 지은 밥을 한입 넣고 반찬을 넣은 후 함께 씹어주면 단맛 뒤에 오는 반찬의 짭조름한 맛이 어우러져 맛을 돋워 준다.


 직접 짓지 않는 밥, 갓 지은 밥이 아니라면 적어도 내 기준에는 밥이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지은 지 몇 시간만 지나도 윤기 나던 밥알의 겉면은 퇴근 후 내 눈동자처럼 생기를 잃은 흰빛으로 변한다. 만약 이틀 이상 둔다면 간이라도 안 좋은냥 누렇게 황달기 돌아다니는 밥을 보기 십상이다. 갓 지은 밥은 장인이 만든 초밥의 쌀알처럼 한 덩어리이면서 동시에 한알 한 알이 살아있다. 적당한 품을 들이기만 하면 누구나 손쉽게 알알이 느껴지는 밥을 맛볼 수 있다.


 짓자마자 잘 뒤섞여 밥알 하나하나에 바람을 쐬어준 밥은 밥그릇에 담는 순간 평평하지도 네모나지도 않은 시골집 뒷산 언덕마냥 정감 있는 봉긋한 모양으로 올라와 준다. 어느 각도에서 숟가락을 들이밀더라도 몸을 잘 내어줄 것 같은 편안한 모양의 밥이 맛있는 모양으로 다가온다. 물론, 누가 뭐래도 젓가락으로 고슬고슬한 밥을 떠올려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난 자연스러운 밥의 모양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로 즉석밥(햇반)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잔뜩 눌려있는 모습은 취사 완료 후 한참 뒤에 열어본 밥솥의 밥과 같다. 아! 공깃밥을 더 싫어한다. 잔뜩 눌려 쪄지듯 지어진 밥들이 답답한 스테인리스 공기에 갇혀 한참 동안 시달리다 나오는 밥. 그래서일까,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바삐 몰려가 먹는 공깃밥의 식단은 제일 기피하는 식단이기도 하다.


 쌀알을 느끼지 못하는 밥, 자극적인 국물이나 양념을 '중화'시키는 역할에 그치는 밥을 먹는 순간은 반쪽짜리 식사를 하는 냥 불만족스럽다. 회사 뒷길에 몰려있는 음식점에서 공깃밥은 허기를 채우는 건더기로써의 역할을 다하고 그대로 잊힌다.  


 매일매일 기억조차 못하는 음식으로 잊히기에는 아깝다. 한알 한알 매끈한 타원형이지만, 뭉치면 형체가 변화무쌍하다. 어느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담느냐에 따라, 누가 담느냐, 누구를 위해 담느냐에 따라 그 모양과 양이 달라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애정만큼이나 높디 높은 고봉밥을 담아 주신다.


 밥심으로 살아가지만, 밥 먹자고 하는 짓이기도 하다. 밥은 수단이기도 하고, 목표이기도 한 음식이다. 오늘은 소량의 밥을 직접 지어먹어보자. 반찬은 그리 중하지 않다. 물론, 필수적인 반찬인 '시장기'는 꼭 지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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