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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나폐인 Jul 06. 2023

부모라는 이름의 죄명

  얼마 전 2살 배기 아이가 형과 함께 놀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면도로에서 벌어진 교통사고. 상상하고 싶지 않은 사고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안타까움과 연민이 가시기 전에, 내 눈길은 댓글란으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무슨 댓글이 달릴 것인지 뻔히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상당수의 댓글이 그랬다.


 이제 겨우 두 살 된 아이를 골목길에 놔둔 부모들이 어이없다
 부모를 아동방임죄로 구속하라
 부모에게 책임을 물어라! 아동의 보호는 부모가 먼저다

 

 아이가 떠난 안타까움을 부모에 대한 비난으로 돌렸던 걸까? 그렇다 해도 너무나 잔인한 처사 아닐까. 만약 부모라면 그 기사의 댓글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슬픔에 자책이 더해지고 다시 죄책감이 몰아닥쳤을 것에 마음이 착잡했다.


 불편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아이의 보육과 안전에 관련된 것을 부모의 100% 귀책사유로 치부해 버리는 언행을 쉽게 해버리고 있지는 않을까.


 아이를 낳고 키워보고 24시간 전적인 양육을 해보니, 잠시의 방임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일전의 글에서도 그랬지만 지금의 육아는 전적으로 물리적 주시를 동반해야 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어려움이 있다고 했었듯이.


 물론 부모가 더 살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전부가 아니다. 부모의 실수나 한시적 방임에도 아이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의도를 가진 강력범죄가 아닌 단순한 사고로부터는 최소한의 안전이 지켜지는 것 그것이 바른 사회고 올바른 시민의식이 아니던가.


 오롯이 개인의 책임,  부모의 책임으로 몰기엔 너무하지 않은가. 그 아이는 마치 유복하지 못하고(그래서 그런 위험한 동네에 살고), 무책임한 부모를 만난 "불운"으로 떠나게 된 것인가?


 참으로 무섭고 가당찮은 지적이다. 사고라는 것의 귀책을 씌울 것이 없어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씌운단 말인가?


 이태원 같은 곳에 굳이 자식을 보내놓고 누굴 탓하는가?


 묘한 기시감이 든다. 우리는 어느샌가 피해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 언행을 쉬이 일삼는다. 제도는 시스템은 규칙은 그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노키즈존은 천방지축 아이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들(aka 맘충 등)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마치 엄정한 사실을 정정해 주는것처럼 내뱉는 궤변이다. 지나치고 성급한 일반화의 전형이다. 그럼에도 2살배기 죽음의 댓글처럼 일상적으로 퍼져있다.


 부모의 책임을 묻기전 이면도로의 통행환경,  보육시스템의 부재와 미비, 운전자의 안전운전 의식 등을 따져 물어야 한다. 그리고 부모가 좀 더 주시했어야... 안타깝다...는 반응이 이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이런 알맹이 빠진 기사를 속보인냥 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기자 역시  댓글에 달릴 글은 충분히 예상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오늘도 여럿의 예비 부모들은 이 땅에서 아이를 낳기 싫은 이유를 찾아간다. 생명의 책임이 오롯이 나에게 있다는 무서움.  그것이 경제적인 것을 넘어 물리적인 것 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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