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난생처음 캐나다 여행을 혼자 간 적이 있습니다. 해외를 나간 것도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탄 것도 생전 처음이니, 첫 해외행 치고는 제법 먼 거리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제 여행 스타일 대로 전체 일정과 지도상 숙소를 잡은 것이 여행 준비의 전부였죠. 중학교 때 즐겨 듣던 유키구라모토의 lake louise가 들어 있던 앨범 재킷의 수면에 비친 침엽수 사진이 눈앞에 펼쳐질 때는 정말 황홀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서부 소도시 잡화점이나 주유소에서 만난 몇 한국인 이민 가정이 있었습니다. 사장님은 제게 영어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제 영어가 짧은 걸 보니 차이니즈냐고 묻더군요. (제가 해외에서 차이니즈에 가까운 외모인가 봅니다. 한국사람도 그렇게 보다니!) 이민자 분들을 만날 때마다 물어본 질문이 있습니다.
사장님, 캐나다 오셔서 행복하세요? 일이나 적응은 고되지 않으세요?
대답은 비슷했습니다. 힘들다.. 다만, 한국에서 보다 행복하다. 고되지만 오히려 행복하다. 그 행복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저녁 7시만 넘으면 조용해지는 거리, 돌아다니기 제법 무서워 보이기도 하는 곳, 편의시설도 부족해 보이는 곳, 무엇이 행복감을 느끼게 할까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역시 그 무언가 지루한 듯 한 일상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던 차라, 공감은 적잖이 되더 군요.
제법 뜨거운 햇빛을 막을 겸, 에드먼턴 시내에 있는 쇼핑몰에서 모자를 하나 샀습니다. 가게에 들어서서 점원을 불러서 가격 등 구매 관련 물어보려 하니 점원이 저를 쳐다보며, 잠시 주시하며 사인을 주더군요. 사인은 별것 없었습니다. 손바닥을 제게 보이며 고개를 저은 것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나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 기다려요
딱, 이 정도 바디 랭귀지였던 것 같습니다. 영어 못하는 차이니즈 관광객 정도로 보았을 수 있겠지만, 상당히 생경한 느낌이었습니다. 난 손님인데, 점원이 말한 마디 안 하고 날 멈춰 세우고 기다리게 만드네?라는 생각은 잠시였습니다. 당시에는 영어가 짧은 스스로를 아쉬워할 뿐이었죠.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상당히 부러웠습니다. 뭐랄까요? 사람간에 뭔가 동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그 점원이 제 물건의 구매 및 계산을 무례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보다 더 뒤의 일이지만, 홍콩에 갔을 때도 유사한 경험을 했습니다. 약간의 불쾌감이 곁들여지긴 했으나 유사했습니다. 마트 캐셔가 세월아 내월아 결제업무를 하면서 직원 간에 이야기(제겐 잡담으로 보이는) 많이 하더군요. 개인의 템포, 개인의 바운더리, 그것을 지켜보고 감당하는 사람들.
점원의 권리 손님의 권리, 아니 그냥 사람의 권리
이제는 한국인 이민자 사장님의 행복에 대한 한 가지 사유는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없되 그곳에는 있는 것, 저는 그것이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지위 고하, 재력이나 능력, 모든 것과 무관하게 인간 본연에게 있는 권리. 동등하게 서로 응할 수 있는 권리. 저는 그것이 이곳과 그곳의 가장 큰 차이이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정말 편리한 우리나라입니다. 정말 빠르고 정말 좋습니다. 하지만, 권리는 항상 대등하게 존재할 때만 권리일 수 있지 않을까요? 정말 편하고 정말 빠른 우리나라는 바꿔 말하면 누군가의 권리가 누군가에게 다소나마 침해받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동등함이 사라진 권리는, 권력의 개념으로 변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권력을 가지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돈으로 더 많은 서비스를 누리려는 경제적 권력, 더 높은 지위로 누리려는 사회적 권력 등이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이지요. 권력이 있어야, 일방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정말 편하고 정말 빠른 우리나라를 온전히 누릴 수 있으니 그렇지 않을까요?
저 역시 똑같습니다. 매 순간 갑이 될 것이냐, 을이 될 것이냐 저울의 중앙에 서서 반대편으로 달려갈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저 딱 기본만큼 존중받고, 그저 딱 기본만큼 존중해 주기를 바라는데, 왠지 저울은 계속 기우뚱기우뚱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매 순간 꼭 보다 높은 쪽으로 움직이고 싶습니다.
권리에 대한 상실감은 권력욕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자라며 동등한 인격체로 살아본 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유교적 문화의 특질이기도 하고 (일전에 이야기했듯) 존비어의 부작용도 있을 것입니다. (존비어가 무작정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현대사회에 어울리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무시된 권리의 상실은 보상작용을 일으킵니다. 쌍방의 요소 여야 함에도 제로섬 게임처럼 인식되는 것이죠.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에 서고자 하는 것이나 일방(나)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행위로 변질됩니다.
타인도 내 권리를 무시하니 나도 더는 지켜줄 필요가 없는 것이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결제되셨습니다~
오늘도 편의점 직원은 제게 열심히 말해줍니다. 나의 손님으로서 존중받을 권리는 정확한 결제일 뿐입니다만. (우리말이 주어 생략이나 복수 주어 설정이 다반사라 이 멘트가 문법적으로 반드시 틀린것 만도 아니겠습니다...)
저 역시 항상 이것 주시겠어요? 계산해주시겠어요? 멘트를 생활화 합니다. 제 카드 조차도 존대를 받는데, 직원에게 존대 못할 이유도 없지요.
이 무슨 넌센스인가 싶습니다. 그저 담박하고 담담하게 서로를 존중해주는 소통의 수단이 우리에겐 없을까요?우리의 서비스는 왜 항상 위아래가 있을까요?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문화가 잠재적 갑질/진상 보유국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하루입니다. 전 우리가 동등한 소통에 본질적으로 취약한 문화라고 늘 생각합니다.
형님 말 편하게(반말) 하세요. 제가 불편해요.
과장님은 왜 말을 안놓으세요?
제게 형은 친형 뿐이고, 같이 일한지 몇년된 여직원은 동료직원이지 동생은 아니지요. 그저 상호 경어를 쓸 뿐입니다(~했어요? 해줄래요?) 불편하게 할 맘은 없는데 미안하네요.
관계와 지위가 결정되지 않고는 언어 선택이 어려운 사회, 나이에 따라 형 동생 오빠가 수십 수백명 존재하는 사회, 지위에 따른 존/하대가 명확한 사회.
나이/성별/직업/지위/지역/학연/혈연 등등
나의 권리는 만나는 사람과 닥치는 상황속에서 과연 보편적으로 존재할까요? 아무래도 너무 가변적입니다. 잘 살기위해서 매순간 해게모니를 쥐어야 겠습니다. 뭐가 되었던 간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