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없는 도둑 3

3

by 양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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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을 향해 걷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울린다. 아니 진동이 오른쪽 허벅지에 느껴진다. 어쩌면 이것은 지구의 진동이 아닐까. 지구가 무너지기 시작한 조짐이 아닐까.


문득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럴 리 없다. 지구는 나이가 많지만 내가 죽은 이후까지 잘 살아남아, 후손뿐 아니라 다음 지구에 닿은 외계인들도 먹여 살릴 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역시 S카드사의 전화번호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진다. 그녀는 내게 목소리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호기심이 아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근원에 대한 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그녀가 존재하지 않으면 내게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한 번도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고려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 보지 않았으리라.


말투는 또 어떤가. 매번 날카로운 힐난조다. 아이를 나무랄 때의 선생님 톤이다. 아니다. 그 정도라면 고개를 숙이고 잠시 놀라움 속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건 분노를 품고 있고, 적대적인 것이다.


“언제 입금할 수 있어요?”

이 말에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녀는 결코 내 상태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해 가슴으로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정확한 날짜를 말하면 분명 약속으로 잡힐 것이고, 다음에 전화를 했을 때는 왜 약속날짜를 지키지 않으냐고 준엄한 법관처럼 외칠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배운 것처럼 도덕률은 지켜야 한다. 약속이란 반드시 이행해야 하고, 지키지 않았을 때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어떻게 하지? 전화를 받을까, 말까?’


단 몇 초간 수천 가지 생각들이 수십만 톤의 무게로 내 어깨를 내리 눌렀다. 머릿속이 빙빙 돌며 주위에 있는 빌딩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걸음도 자연 휘청거리고 있다. 어느 소설가가 벼랑에서 추락하는 순간 자신의 지나온 삶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더라고 했다. 내게 지나간 삶이란 검고 우울하다. 늪 속에 빠진 사슴의 모습이 떠오른다. 왜 이런 삶을 계속해야 하는지 모른다.


간신히 사무실이 세 들어 있는 빌딩 앞에 이르렀다. 막 유리문을 밀었을 때 다시 바지 속에서 진동이 일어난다. 건물도 따라 부르르 떨고 있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싶다. 거부하고 싶다. 똑같은 일이 반복될 때 같은 방식으로 반응할 필요는 없다. 그대로 유리문을 밀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분명히 S카드가 틀림없어.’

나는 핸드폰을 열어 보지도 않고 추측해 버린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껏 S카드사 여직원은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통화 버튼을 누를 때까지 전화를 걸었다.

‘오늘도 이 여자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사실 그녀는 내게 전화할 권리가 있다. 돈을 갚지 않으면 평생 괴롭힐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샤일록이 안토니오의 살을 베어낼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그걸 비웃어준 것뿐이다. 그런 법은 누가 만든 것인가. 나는 거기까지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법이란 것은 평소에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숨어 있어 형체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단 실체를 드러내면 거대한 벽과 같아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아무리 뛰어넘으려고 해도 넘을 수 없고, 아무리 두드려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하긴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법을 적용받아 처벌받을 것 같으면 누가 부자가 되려 할 것인가.


그녀가 내게 보내는 언어에도 고압적인 힘이 들어 있다. 그녀는 수식이나 꾸밈없이 단순한 단어를 사용한다. 그녀에게는 수사법도 메타포도 없다. 나는 그녀가 하는 어떤 말에도 복종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듯 공손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가슴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네. 알겠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이 남자를 비참하게 하는지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절망이 내 눈을 멀게 하고 슬픔이 심장을 파먹는지도. 그것들이 반복되면서 내 낯빛이 죽음의 빛을 띠게 되는 지도.


이런 그녀를 과연 내가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무슨 빌어먹을 자비나 사랑이라니, 나는 성자가 될 수 없고 애써 노력할 필요도 없다. 차라리 체가 되는 것이 낫다. 체! 아니야. 어쩌면 그녀는 이 일로 인해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을 하느라 심장이 조이는 고통을 느낄지 모른다. 혼자 술을 마시며 이런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생을 저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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