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없는 도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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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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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도 연체자가 되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드회사의 여직원들은 쉬지 않고, 아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게 전화를 할 것이다. 그리고 곧 신용불량자에 등재될 것이다! 이렇게 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말해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좋은 일에 해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런 말은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행여 주위 사람들이 알세라 쉬쉬해야 한다. 주위의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냉담하고 싸늘한 시선을 느껴야 하며, 보이지 않은 멸시와 조롱을 당할 수 있는 말이다.


언제부터 연체자가 되는 것이 사회의 좋지 못한 시선을 받게 되었을까? 아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체자라는 말은 신용카드라는 것이 생기면서 사람들에게 흔히 불리게 된 말이었다.


하긴, 지금 이 땅에는 수많은 연체자가 있고, 심지어 죽는 사람도 있으니까 내가 P카드사에서 대환대출을 신청한 것은 그리 신기할 일도 놀랄 일도 아닌 것이다. 바닷가 수많은 모래 알 속의 하나가 바로 나인 셈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몇 분 동안 내 몸을 휩싸고 지나가는 바람은 얼마나 매서웠는지 모른다. 이제 나는 이 한 겨울 거리에 내몰릴지도 모른다. 두 아이들을 데리고. 신용카드 채권관리 직원들은 각다귀처럼 달려들어 내 팔과 다리 온 몸을 물어뜯고 끝내 피를 볼 것이다.


문득 이런 상태에 빠진 내게 손을 내밀지 않는 누군가가 미워진다. 마치 부모나 연인에게서 버림을 받았을 때처럼 서러워진다.

‘내겐 아무도 없구나.’

문득 국가라는 형체 없는 괴물이 미워진다. 왜 하필 국가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어려울 때 내가 도와줬지만 막상 내가 어려울 때에는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서로 어려울 때 돕고 사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국가라는 것을 하나의 인격으로 보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림을 그려본다. 아주 욕심이 많고 심술이 많은 아저씨.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 힘이 센 친구들과 어울려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 입에 발린 말로 위로하고, 뒤돌아서서 조롱하고, 쑥떡거리는 장난꾸러기.


이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유쾌해진다. 국가가 있어야 내가 있는 거라고?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은 이런 말들을 곧잘 했었어.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고 말할 것이다. 아마 당신들도 이런 말들을 철썩 같이 믿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다. 이제 그런 말들은 뜻이 달라졌어. 그것은 국민들을 현혹하기 위한 세뇌용 경구들이야.


국가가 없으면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으면 국가는 없다, 라는 평범한 진리를 나는 오늘에야 깨달았다. 정말 바보 같다! 삼십 대 후반에야 이것 깨닫다니.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지 갑자기 겁이 난다. 지금까지 이 나라 국민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독재자는 죽고, 폭력적인 공화국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속에서 활개 치던 사람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기세 등등 살아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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