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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상태나 기분이 내일까지 지속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기쁜 자는 내내 기쁠 것이고, 슬픈 자는 내내 슬플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약간 원기를 회복했다. 잠든 아이들 얼굴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천진한 이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고 중얼거렸다. 미세한 세포에서 성장하여 손가락, 발가락 등 몸이 제 모습을 갖추었고 머리카락도 윤기 있게 빛나는 이 아이들은 분명 내 아이들이었다. 어제 저녁 문방구에 가서 몇 푼 남지 않은 돈으로 학교 준비물과 스케치북을 사주었다. 마치 아이들과 마지막이 되기나 한 것처럼.
그러나 나는 이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맡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로지 일과 돈만 생각하는 할머니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제발 하루만 맡아달라고 했는데도 일이 있다고, 거절한 적이 있다. 아동보호소에 가거나 가정집에 맡겨지는 장면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나로 인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들로 인해 삶의 희망을 얻는다.
차의 시동이 걸리자마자 핸드브레이크를 내렸다. 나는 어떤 생각으로 이 차를 산 것일까. 어리석은 허영심에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사서 할부금 갚느라 고생했다. 지금이라도 팔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내는 차를 파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집은 없어도 차가 있어야 하는 시대다. 이상한 시대이다. 차는 천천히 굴러가다가 마을 입구 다리에서부터 제 속력을 냈다.
어젯밤 꿈이 떠올랐다. 나는 중학생이었고 친구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우울한데다가 말이 없던 내게 친구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도둑질을 했다는 말을 누군가가 퍼트린 후에는 이상한 동물 보듯 했다. 그런데 내게는 이상한 병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서 누구도 나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나 울었지만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제일 뒷자리로 물러나 앉았다. 키가 작아 칠판이 보이지 않았다. 뒷자리로 간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간섭을 피해 마음껏 일을 하고 싶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중학교 1학년 때 기억이 났다. 아이들과 한바탕 다툰 후 제일 뒷자리에 앉았던 적이 있다. 이 기억과 관련된 꿈일까. 연관이 있었다. 나는 사진값을 훔쳤다는 말을 퍼트린 친구와 절교를 한 적이 있다. 내가 훔친 것은 돈이 아니라 매직 하나였다. 그 친구와 3년 가까이 말을 하지 않았다. 먼저 화해를 청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왜 꿈에서는 학교를 나오게 된 것으로 나왔을까. 마치 실업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장면이 바뀌어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전에 같이 근무했던 상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상사는 나의 능력을 한껏 이용했지만 여러 사람들 앞에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꿈을 어떻게 해석할 수는 없었다. 단지 꿈을 꾸었을 때의 기분이 전체를 해석하는 데 용이했다.
y은행에서 여직원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너무 이르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래, 나를 너무 억제하지 말자. 슬픔이나 기쁨을 억제하는 것은 미덕에 속할 수 있었지만 그것들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왜냐하면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면 그 감정의 근원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고 예기치 않은 감정을 불러일으킨 상황이나 과거의 기억을 잘 처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래, 어느 것도 나를 억압하도록 두어서는 안 될 것이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서 길들여지는 것. 그런 뒤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이야말로 지배자들의 철학이고 긍정일 것이다.
나는 이런 말들을 생각하며 니체를 떠올린다. 니체는 어떻게든 내 인생의 한쪽에 버티고 있었다. 수시로 그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것처럼 들려온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빈곤하고 허약한 지성의 소유자들이니까. 국가주의나 가족주의, 가부장주의 같은 정치적 극우 이념은 실상 약자의 도덕일 뿐이다. 니체는 커다란 사유의 망치를 들고 낡을 것들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기도 했다.
내가 처음 읽은 것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였는데 거기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보았다. …강자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자이며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다. 약자는 자신의 가치판단을 언제나 자기 밖의 어떤 것, 가령 법 같은 낡은 것에 넘겨주는 자이다. 부정과 파괴야말로 긍정의 조건이다. 미래를 창조하려는 자는 먼저 과거를 부정하고 파괴하여야 한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 해방자이며 그런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 또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나의 천지신명, 세계 어느 곳곳에서도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천지신명은 정화수를 떠놓고 애원하는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어느 것도 너를 억압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그러려면 네가 사는 사회의 가치에 복종해서 길들지 말고. 정신적으로 허약한 그런 지배자들이 하는 말들은 믿지 말거라. 정말 강한 사람은 그런 놈들이 아니다. 권세가 있고 돈이 좀 있다고 강한 것은 아니다. 정말 강한 사람은 자기를 아는 사람이고 스스로의 행동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놈은 항상 법을 등에 지고 양반님네가 되어 체면을 내세우고 나이가 많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너처럼 미래를 만들려는 사람은 먼저 과거를 싹 부정하고 파괴해야만 해. 총을 내가 너에게 주랴. 망치를 주랴. 아니 그러기 전에 너는 고통을 좀 겪어야 해. 그런 고통이 너를 심오하게 하고 그때마다 입은 상처로 너는 강해지고 힘을 회복할 것이다.
…지배도덕이 어떤 욕망의 표현이었듯이, 진리라는 것도 어떤 힘의 표현일 뿐이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맹목적인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진리는 진리 바깥의 어떤 힘에 의해 진리가 된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짓눌렀던 반공이데올로기는 스스로 아무런 진리가치가 없다. 극우 독재세력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끌어들였고, 그들의 힘에 의해 진리로 횡행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