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없는 도둑 17

by 양산호

장정일의 책이 있는 풍경을 읽는다. 엠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 그리스 국가들이 아테네에게 했듯이 지구라는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있는 미국에게 세계가 바치는 조공의 내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나의 천지신명, 세상 어느 곳에도 살아있는 천지신명은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미국을 비난하는 놈들이 많기는 많다마는 누가 나처럼 목청 돋워 말할 수 있으랴. 미국에 조공을 바치는 네 나라를 보거라. 미국이 참전하는 각종 전쟁에 군비만 보탰냐, 목숨도 보탰제. 그러고도 미국은 6·25때 도와준 거 갚으라고 한다. 지금도 사대를 말하는 네 나라에는 첩자들이 많니라. 미제 무기가 아니면 살 수도 없당께로. 달러가 아니먼 돈으로 치지도 않는당께로. 글고 미국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준다고 씨부렀냐. 그놈들은 절대로 아퀴 짓는 짓은 안 해. 분쟁이 있어야 먹고 산께노. 글고 미국은 이라크나 이란 북한 같은 나라만 상대한당께. 글고 자꾸 신무기만 개발해. 즈그가 최고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최고인 줄 알아주제.

잠시 후 화장실로 갔다. 엉거주춤 앉아 전기요금 고지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했다. 이건 우리가 쓴 요금이 아니야. 아래층 여자네 집 것이 분명해. 우리 집하고 같이 합산되어 나온 요금인가? 몰랐지만 그 여자에게 그걸 말하기는 곤란했다. 계량기 번호만 확인해도 알 일이 아닌가. 아니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른 체 하자. 20일이 되기 전에 문제를 만들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잖아. 기분이 나쁜 그 여자가 무슨 일을 할지 모르잖아. 에이 함부로 말도 못하겠군. 그 여자는 왜 그러지. 이렇게 사소한 것에까지 욕심을 내는지 알 수 없었다. 돈이 없지도 않을 텐데. 그래, 합산되어 나왔어도 우리 요금은 얼마 안 되니까 내지 말고 기다리자구. 안 내고 있으면 그쪽이 더 당황할 거야.

“그냥 내지 말고 있자구. 돈도 없는데.”

왜 이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무심코 툭 던져진 말. 내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이 엉뚱하게 흘러나왔다. 앞뒤 전후 사정을 좀 더 차근히 말해야 했나. 아내의 반응이 나오기까지도 그것을 몰랐다.

“아니, 지금 그런 말 할 거야. 겨우 참고 있는데, 서글프게.”

아차, 싶었다. 왜 이렇게 입은 내 환경을 반영하지 못하는가. 화가 난 아내는 커피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뒤따라갔지만 말을 붙이지 못해 책상 앞에 앉았다. 말을 할 때도 요령이 필요한 거야. 좀 더 기다리자.

“자기는 한 번씩 보면 속이 시커멓더라.”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언어란 얼마나 불성실한 것인가. 내 마음의 반도 전달하지 못한다. 좁쌀 정도만 전달한다. 좀 더 생각했다. 남자와 여자는 이해하는 방향이 다르다. 아주 오래 전, 석기 시대에 사냥을 했던 남자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건물이나 거리 같은 큰 것에 여전히 익숙하고, 여자는 장롱이나 옷장 안에 든 작고 사소한 것들을 더 잘 안다. 그래서 사냥감을 찾듯 채널을 돌리는 남자는 옷가지 하나 쉽게 찾지 못한다. 변명이라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을 들이대고 따지게 되었을 때 아래층 여자가 얼마나 무안하겠어. 그런 상처는 쉽게 못 잊지, 암 못 잊어. 그래서 나는 그냥 놔두자고 한 거야. 내가 무슨 딴 속셈이 있는 줄 알아?”

그 말에 아내가 웃었다. 아내는 몇 차례 사기를 당할 만큼 순진했고, 어리석은 나도 아내를 이해하고 감싸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순진해서 그렇지.”

“맞아. 그렇구나. 두구동에서 사기 당한 것부터 해서 말이야.”

그녀가 웃자, 나도 속이 스르르 녹았다.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야. 어려움을 헤치고 나갈 실마리가 보이는 듯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잠들었을 때 그녀는 내 요구를 거절했다.

“마음이 심란해서 아무 생각이 없어.”

그녀는 몸을 돌리고 누웠다. 나도 굳이 조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조르디가 아니다. 언제 길거리로 내쫓길지 모르는 판인데도 여전히 치밀어 오르는 성욕.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하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고 걸려오는 카드사 전화처럼 더럽고 질긴 인간의 욕망. 이 더러운 욕망은 늘 대상을 가지고 있다. 대상이 없으면 해소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작동하는 신체에 욕망이 차오른다. 돈도 마찬가지다. 쉬지 않고 그것이 필요하다. 물건 하나하나, 삶의 하나하나에 돈이 매겨진다. 그 점에서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 내는 식물과 달리 대부분의 인간은 실망스럽다, 저속한 욕망의 노예들, 약탈자들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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