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메타버스(Metaverse)
사람이 성숙해지는 계기는 무엇일까? 여러 갈래가 있겠으나, 그중 나만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경험은 특별하다. 흐물거리며 무너진 잔해들은 내가 걷는 울퉁불퉁 변덕스러운 길목을 덮어주어 발 딛는 곳마다 안전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세계관이란 내가 세상을 인지하는 큰 틀이다. 대표적으로 게임, 소설, 아이돌그룹컨셉 등 임의로 설정한 스토리식 세계관이 있다. 최근 메타버스가 대세 중 대세로 떠오르는데, 이게 무엇이냐, 가상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구현한 기술이다. 비록 가상 세계지만 그 영역에 한계가 보이지 않는다. 실제 돈을 주고 부동산을 매매하는 행위까지 이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만큼 다양한 상상력과 컨셉을 가지고 현실 세계를 구현해 낸다. 즉, 100개의 가상공간이 있다면 100개의 세계관이 존재한다.
하지만 세계관이라는 것은 마냥 나와 동떨어진 가상의 컨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나를 둘러싼 세상과 세상 속의 나를 정의하는 관점이라 칭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세계관이 존재한다. 이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집착과 회피 본능은 각자가 자라온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데, 이 두 가지가 세계관의 뼈대를 세운다. 여기에 수많은 가치판단이 살이 되어 뼈대에 붙는다. 나만의 세계관이 꾸려진다.
<A> 당연히 안 좋아지지. 지금 이 순간도 환경은 오염되고 파괴되어 가잖아. 언제든 지구를 초토화할 핵무기를 가진 나라도 여럿 있고 하다못해 코로나19 바이러스 하나로도 전 세계가 초토화 돼버리잖아. 쓸 수 있는 한정된 천연자원은 점점 고갈되어 가지, 세계를 주도할 AI 인공지능은 미래 인류를 심각히 위협할 거야. 기술이 발전해도 여전히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문화는 남아있다고. 사람의 본능은 이기심이기 때문에 건강한 합의가 이루어지기는 힘들 거야.
<B> 나아지고 있어. 전 세계적 생활 수준도 50년 전에 비하면 월등히 나아졌고, 극빈층도 훨씬 줄어들었어. 여러 사회적 국제적 문제가 있지만, 양심적 합의와 자정 작용으로 결국은 발전 방향으로 갈 거야. 인류는 언제나 위협에 맞서 대체할 방법을 만들어냈고 위기를 극복해 왔어. 생존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결국 세계는 점점 더 나아질 거야.
<A> 사람은 우주에서 보면 점 하나로도 보이지 않는 작은 존재야. 한 사람은 우주 모든 생명체의 1/n만큼의 값어치를 지니지. 물론 사람이 고등생물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사람들끼리만 잘살게 될 뿐 자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아. 자존감을 높이는 방편으로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할 순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그저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 죽으면 끝인걸.
<B> 사람은 특별한 존재야. 다른 생물들은 그저 먹고 자고 번식 활동을 하는 기계와 같다면, 사람이 선택하는 색깔에는 한계가 없어. 무언가를 숭배할 자유도, 독립할 자유도 있고 수만 가지의 직업도 있어. 원하는 것을 연구하여 새로운 자연의 이치를 발견하면 그것을 인류의 것으로 흡수하여 끊임없는 발전을 이룰 수도 있지. 사람의 물리적 크기나 힘은 중요하지 않아. 자연법칙과 사물을 지능적으로 활용하여 자아실현을 이루는 존재니까.
A와 B의 예시는 세상을 인지하는 서로 다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 추세에 대해, 사람의 존재의미에 대해. 포괄적인 범위에서 좁은 범위로도 갈 수 있다. 세계를 구성하는 그 무엇에 관해서도 상관없다. 법, 질서, 자연, 인간관계, 본능, 교육, 경쟁, 생로병사, 감정, 예술, 시장경제, 안보, 과학, 차원, 조직, 이상, 철학, 종교, 도덕, 꿈 등.
다른 질문을 던져본다. 내가 구축해 온 나만의 세계관이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경험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무너진 그것을 재조립하여 더 단단한 구조로 쌓아 올렸는가? 그러했다면 그마저도 상당 부분 뜯어고쳐 완성해 보았는가? 한쪽으로 내려가 있는 시소를 반대쪽으로 뒤집어보고, 뒤집은 힘의 감각을 기억한 후 중심 잡힌 평형 상태로 맞춰본 적이 있는가?
필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변화를 세 가지 단계로 얘기해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고민과 사색을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며 ‘옳은 것, 바른 것, 맞는 것, 정답’을 찾아야 하는 강박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다소 불편하고 비판적이고 삐딱하기까지 한 시선으로 현상을 보기 시작했다. 단점과 허점이 보이면 신뢰할 수 없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뭐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이면의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하는 일명 프로불편러 시절
책을 읽으며, 많은 뉴스와 정보를 접하며, 더 많은 사람과 대화하며 느끼게 되었다. 이 세상을 옳고 그름의 양양극단으로 나누려 한 것은 나의 편의를 위한 게으른 생각이었음을. 비판적 사고의 산물인 옳고 그름이라는 구분이 무색하게 내가 접하는 외부의 현상, 생각, 사상, 분야는 고유의 색깔을 가지며 무수히 많은 스펙트럼을 펼치고 있었다. 불완전한 부분이 보인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맡은 역할이 있는 것이었다. 마치 채소에서 왜 고기와 과일 맛까지 나지 않냐며 불평하던 셈이었다. 억지스러웠다. 또한, 그동안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하는 본능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게 되어 많이 후회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비판적 사고와 깊은 사색에 불편감을 느끼고 멀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멀리하는 그 느낌 역시 편하지 않았다. 중재 지점을 찾아 나섰다. 나와 다른 사람, 생각, 사상, 성격일지라도 먼저 그 자체 고유의 가치를 인정한 후 그 자연스러움을 존중한다. 대상을 절대 양극단으로 몰아넣지 않고,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나름의 단계를 정해준다. 그곳에 비로소 비판의 색깔을 곁들여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다. 남들이 이미 다 해주는 영양가 없는 비판 비난의 말보다는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색다르게 접근해 보는 연습에 매진 중이다.
이러한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고 인지하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여 선택과 결정을 내리고 행동구조로 쌓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성숙하게 하여 준다. 깨지고 깨져보며 양극단을 경험해 보고 스스로 깨우치는 과정을 통해 내면이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알을 깨고 나오자. 진리에 가까운 정답을 찾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내가 가장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에게 맞는 세계관’을 부단한 노력을 통해 찾아가고 그 스토리를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냐면 이 스토리는 환경 속에 결정된 나의 모습을 브리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몸부림치며 주체적으로 다져낸 모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