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책임감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른이라면 본인이 옳다고 여기는 사상이나 신념을 아이들이 일찍 알수록 좋다고 하여 가르치려 하면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실제로 가장 옳고 합리적인 것일지라도.
미취학 아동에게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며, 학생의 정서와 의식 세계는 부모와 교사가 좌우하기 마련이다. 사회망 안에서 다각도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성인과는 많이 다르다. 따라서 성인은 본인만의 충분한 관계와 경험을 지속하며 옳고 그름의 가치관을 정립해 나갈 수 있지만, 미성년자의 사회적 관계는 대개 촘촘하거나 다양하게 뻗어있지 않고 획일적인 소통 관계가 주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인도 되지 않은 학생을 이끌고 책임지는 어른이라면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 '덜어내기'라고 본다.
학생에겐 충분히 보고 듣고 경험할 자유와 선택권이 필요하다. 하나 어떤 부모와 교사들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그것을 학생에게 조기교육시키려 든다.
개인적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도 원망스러운 교사들이 많다.
가령 필자의 중학교 시절 모 과학 교사는 '아폴로 11호 달착륙 조작설'을 다룬 다큐를 우리 반에 틀어준 적이 있다. 아는 게 없고 순진했던 나는, 그 교사의 권위와 그 다큐의 의도한 연출에 함몰되어 그 내용이 진짜일 것 같다는 생각에 빠졌고, 그 생각이 가지를 뻗어 다른 미스테리한 음모론들을 찾아보며 흥미로워하기도 하고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달착륙 조작설이 허무맹랑한 음모라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로부터 몇 년이 걸린 후였다.
고등학교 때 모 영어 교사는 넉넉하고 선량한 성격 덕에 대부분의 학생에게 호감을 사고 있었는데, 나는 또 그 이미지에 속고 말았다. 그 교사는 수업 시간에 대놓고 A신문이 가장 정확하니까 보라고 추천했는데, 언론사의 이해관계나 생태계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선생의 권위에 짓눌렸던 나는 그 A신문이 가장 믿을 만한 신문이라고 몇 년을 착각하며 살아왔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여러 언론 활동을 하다 보니 A신문에 대한 그 생각이 그 영어 교사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향적인 견해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아무리 옳다고 믿는 것이라도, 아니, 그게 실제로 가장 옳고 합리적인 것이라도 학생들에게 함부로 반대되는 것과 선악을 나눠 편향적 교육을 시키려 하면 안 된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스스로 경험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련의 경험적 과정이지, 옳고 정의로운 정답 따위가 아니다. 가르쳐야 할 것은 공동이 합의한 도덕과 규칙 정도면 충분하다. 더 나아가 종교, 정치, 역사, 사회 문제를 가르칠 때는 사실에만 기반하여 공평하고 객관적이도록 노력하자.
내가 만약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라 해도 훗날 낳을 내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교회에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 교회에서는 불교 등 다른 종교의 가치를 배우기 힘드니까. 내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경험을 쌓고 가치를 분별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그때 넌지시 권해보겠다. 내가 설령 B정당의 지지자라 할지라도 내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는 내가 누구에게 투표권을 행사했는지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기업과 노동자 중 한쪽 편에 감정을 이입하여 편을 들고 있다 해도, 어느 쪽이 더 잘하고 잘못하고 있는지를 편을 갈라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역사적 인물이 악인이냐 범인이냐는 평가 또한 마찬가지로 알려줄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만을 알려주고, 그 인물에 대한 판단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도할 것이다. 나는 내 자식이 스스로 경험하고 판단하고 분열하며 알을 깨고 나오길 바라지, 수년 수십 년 세월의 경험으로 정착된 나만의 결론을 아무 대가 없이 이식시켜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직 풋내기에 불과한 나의 철학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