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과 악당에 대한 주제

by 강유원


세상을 구하기 싫어진 영웅과 번아웃에 온 상담사의 만남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

상담사는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상담 차트는 영웅의 이름을 제외하곤 텅 비어있었다. 영웅이 마침내 “애초에 전 왜 세상을 구하고 싶었을까요?”라고 물었을 때, 차트에는 드디어 첫 메모가 적혔다.

‘주 2회 이상의 고강도 운동 권유.’ ​

폰트를 필기체로 바꾸고 글자를 살짝 눕혀 타이핑 하고나니 다시 원래 폰트로 돌아가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얼마 안 가 영웅의 한탄을 멎게 할 상담사의 깊은 한숨이 내 입에서 먼저 나왔다. ​


마침표를 찍으면 찍을수록 이상한 설정의 인물들이 이해되다 못해 당연하고 진부해졌다. 영웅의 탈선은 이제 익숙한 클리셰가 되었고, 번아웃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흔해졌다. 권태감에 미칠 것 같은 건 저 상담사가 아니라 이런 플롯을 접할 독자가 아닌가. ​


차라리 이런 건 어떨까. 저기 상담사 자리에 악당을 앉힌다. 그리고 영웅을 설득하도록 한다. 영웅이 번아웃을 겪을 때 가장 곤란한 건 어쩌면 정체성의 위기에 처한 악당일테니까. 영웅과 악당의 우애라…이것 역시 한물 간 클리셰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둘이 마주 보고 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일이 뭘까. ​


아예 둘이 어떤 협약을 맺는 건 어떤가. 세상을 딱 지금 이 상태로만 유지하자는 서약서에 악당과 영웅이 나란히 사인을 한다. 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을 땐 악당이, 세상이 더 후져질 땐 영웅이 나선다는 항목을 가운데 두고 둘은 악수를 한다. 하지만 이런 조약 하에 정기적으로 대거리를 하다보면 왠지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아 약간의 설정을 추가한다.

세계가 핵폭탄을 둘러싼 지리멸렬한 언쟁을 끝내고 일종의 평화 협정에 도달할 때 쯤 악당은 폭탄을 훔쳐 랜덤으로 각 국가에 배분한다. 세계 질서는 이제 국가 수장들의 눈치싸움으로 재편된다. 모두가 자신의 패를 감춘 채 숨 막히는 포커 게임에 열을 올리면 악당은 그제서야 흐뭇하게 웃으며 두부 부침을 먹는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며 채식을 시작한지 5년 째, 영웅에게 늘 핀잔을 듣는 부분이다. 그건 세상이 나아지는 쪽이지 않나.

한편 그런 잔소리를 하는 영웅도 협약을 제대로 이행하는 편이 아니다. 악당과 지겨운 대거리를 할 때면 영웅은 꼭 뭔갈 부수거나 없앤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을 일부러 맞아 수원 화성의 성곽에 박힐 때도, 악당을 집어 던져 설악산 흔들바위를 넘어뜨릴 때도, 심지어 악당이 휴가를 떠난 어느 여름에 혼자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하며 제주 만장굴을 메꿔버릴 때도 영웅은 깔깔거린다. 악당은 그날 처음으로 영웅에게 화를 낸다. 악당의 고향은 제주다.

하지만 선과 악의 이분법이 갖는 맹점 역시 진부해 다시 고민에 빠진다. 주인공을 이 둘의 협약 당시 공증인이 되었던 변호사로 해보자. 영웅과 악당은 거의 매일같이 사무실로 찾아와 상대의 계약 불이행에 성을 내다가 변호사가 타준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겨우 돌아간다. 변호사는 매일같은 이 일상에 권태를 느낀다. 아니, 이러면 그냥 처음 이야기에서 상담사가 변호사로 바뀐 거랑 뭐가 다르지..?!​


다시, 다시 해보자. 악당은 유튜버다. 13.2만 유튜버. 악플마저도 즐기는 악당에겐 천직이지만 한가지 불만인 점은 조회수이다. 대충 흔들리는 화면 안에 영웅의 모습이 잠깐이라도 잡힌 영상은 별 노력 없이도 100만 뷰를 찍곤 하는데, 악당의 영상은 편집, 자막, 음악까지 화려해도 조회수가 4자리를 넘어가지 않는다. 영웅에게 부탁해 썸네일에 출연해달라고 부탁할까 고민하는 악당이다. 이런..! 악당이 너무 귀여워져버렸다. ​


이렇게 하자. 어느 날 영웅이 죽는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 초의 석촌호수 정중앙으로 영웅이 날아와 꽂힌다. 목격자는 도넛처럼 호수를 둘러싸고 있던 나들이객 수만명. 모두가 입을 모아 악당의 짓이라 했지만, 그 시각 악당은 하와이에서 열린 기후위기 국제포럼에서 영웅의 죽음을 듣는다. 악당은 언젠가 꽃에 둘러싸여 죽고 싶다는 영웅의 말을 기억한다. ​


커피를 잘 타는 변호사가 말한다. 영웅은 자신의 상속인으로 악당을 지목했다. 그리고 동시에 악당은 영웅을 죽인 용의자로 수배중이다. 영웅을 죽일 수 있는 건 악당 뿐이라는 오만한 생각과 함께 세상은 잔뜩 긴장한다.

그 후로 악당은 3년 간 모습을 감춘다. 사람들은 영웅이 악당과 함께 죽었다는 속 편한 이야기를 마구 만들어낸다. 한 편에서는 돌아올 악당에 대비해 전력을 갖춘다.

영웅의 시체는 예로부터 명당으로 지정된 태릉 근처 왕가의 무덤 가에 묻힐 예정이었으나, 전주 이씨 종친회와 학자들의 격렬한 반대로 이리저리 옮겨진다. 결국 이런저런 핑계와 돈이 오간 후, 서울 시청 앞 풀밭에 거대한 무덤이 세워진다. 맞은 편 호텔의 뷰를 가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높이와 시청 건물과 조화를 이룰만큼의 화려함이 돋보인다.

형광 풍선들과 영웅의 머리 부분이 뻥 뚫린 얼굴 간판, 그리고 그 앞에 길게 선 줄. 오랜만에 돌아온 악당은 영웅의 무덤을 한참 보다가 한밤이 되자 행동에 나선다. 허술하게 묻힌 영웅의 시체를 몰래 빼내 잠실로 향한다. 한밤중에 석촌호수는 뒤엎어졌고 물기 하나 없는 거대한 무덤이 된다. 만장굴을 메꿀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머지 않아 잠실동의 집값이 조금 떨어진다.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재단을 지어 돈을 남긴 영웅, 그리고 그 영웅재단의 이사장이 된 악당.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까…

“흔한 얘기인걸요, 세계를 구하고 본인은 망하는 거.”(박서련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참 뻔한 이야기구나 싶네. 자, 그럼 1번-세계도 망하고 본인도 망하기, 2번-세계도 구하고 본인도 구하기, 3번-세계는 망하고 본인은 구하기. 이 중에 뭘로 할까.

2번은 벌써 지겹고, 3번은 왠지 슬프니까, 1번으로 할까? 보아하니 세상은 이미 망하는 쪽으로 가고 있고, 악당은 약간의 가속도만 주면 된다. 흠…어떻게 할까…아참! 악당도 망해야 하는데! 음…이건 더 쉽지. 영웅이 되면 끝이지.

자, 정리. 악당은 영웅이 된다. 더이상 기후위기를 걱정하지 않는다. 영웅이 보고 싶을 때면 그가 하던 짓을 흉내낸다. 원맨쇼를 하며 이것저것 부순다. 사람들은 새로운 영웅에 열광한다. 시간이 남으면 만장굴을 조금씩 파낸다. 그 안에서 세계가 망하길 얌전히 기다린다. ​


석촌호수와 만장굴에는 두 명의 영웅이 묻힌다.

이런 이야기는 쓰지 않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