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 주목!
“한 살 두 살 세 살 때 기억나는 사람?”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엄마 밖에 없을 걸?”
“그때가 궁금한 사람은 엄마한테 다물어봐!”
“놀랍지 않니? 엄마가 너희의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게!”
세 아이들은 하나도 놀랍지 않다는 표정 들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나를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것 같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요즘은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그러다 내게 사진처럼 남아있는 한 장면이 떠올랐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댁은 시골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서 40분을 더 걸어 올라가야 나오는 춘천 동면 사암리 맨 꼭대기 집이다. 버스가 엄마 나 남동생을 내려놓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되돌아 나가고 나면 나는 조금 흥분 상태가 되곤 했는데 이때부터 길 양옆으로 난 강아지풀 이며 코스모스 이름 모르는 풀들을 마음대로 꺽었다. 꺽은 풀을 양손에 거머쥐고 흔들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지휘하는 사람처럼 박자를 맞췄다. 논에서 길로 튀어 나온 메뚜기나 청개구리를 발견하면 손에 쥔 풀들로 그것들을 툭툭 건들면서 살았나? 죽었나? 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논으로 폴짝 뛰어 오르면 캭캭 소리를 질러댔다. 조그만 돌을 발로 ‘툭’ 차면 오르막길은 다시 내게로 ‘툭’ 차줬다. 돌을 차고, 또 차고, 몇 번을 반복하고 나면 앞머리가 땀으로 흠뻑 젖곤 했는데 딱 그때쯤 오르막길 중턱에서 느티나무를 만나게 된다.
나는 반가워하며 느티나무의 그늘 속으로 ‘풀썩’ 뛰어 들어가 앉는다. 돌에 아무렇게나 척 걸터앉아 숨을 고르고 있으면 느티나무 잎들을 흔들며 바람이 불어온다.
“ 와 너무 시원해”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오르는 길에 미쳐보지 못한 복숭아나무가 장등 밭 마다 가득 심겨져 있다. 나무마다 한 가득씩 매달려 있는 짙은 분홍의 꽃잎들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내 모습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찍혀 있다.
그런데 엄마가 기억하는 장면은 나와 너무 달랐다.
엄마의 말로는 버스가 엄마 나 남동생을 종점에 내려놓고 떠나고 나면 이때부터 지옥이 시작 됐다고 한다. 호기심이 많고 나대던(?) 성격의 나는 흙길인 시골 오르막길을 있는 대로 뛰어 올랐고 그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을 깠는데 울기는커녕 길가에 난 꽃이나 풀들을 마구 꺽으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갔다고 한다. 길에서 갑자기 만나는 벌레나 곤충 개구리 메뚜기들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들쑤시고 건드리면서 꺅 꺅 소리를 지르는 나를 보면서 같이 기겁을 했다고.. 인천에서 시집온 엄마는 시골길에 익숙하지 않았다.
“뛰면 안 돼”
“조심히 걸어”
“벌레들 그냥 내비 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느티나무쯤 오면 기가다 빠졌다고 한다.
남동생도 숨은 복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할아버지 댁에 갈 때 엄마의 양손엔 짐이 한가득 이라 손을 잡아 줄 수가 없었다. 두 남매가 같이 손을 잡고 가게 했는데 내가 달리고 뛰는 통에 나를 잡는다고 동생도 뛰고 달리다 뒤로 쳐지면서 엄마의 무거운 손에 매달려 업고가라 안고가라 징징 댔단다. 어르고 달래며 어찌어찌 느티나무 까지 갔는데 동생은 나무 밑에 대자로 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폭발한 엄마는 눈에 보이는 나뭇가지를 주워 스스로 걷겠다고 할 때 까지 때려 줬다고 한다. 나는 동생이 맞든지 말든지 태평하게 돌에 걸터앉아 흥얼흥얼 거렸다고 한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두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오르는 길이 얼마나 멀고 힘들었을까?
앞으로 내달리며 자꾸 넘어 지는 아이에게 다치지 않으려면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있는 힘껏 외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다 또 자빠지는 아이를 보면서 얼마나 조바심 태웠을까?
느티나무아래 그늘에서 딱 절반만큼 온 길을 바라보며 아직 가야 할 길의 막막함은 엄마 혼자 생각 했기에 나의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답게 기억 될 수 있었다.
엄마가 함께 걸어 줬기에 이만큼 성장 했으면서도 내가 두발로 걸었다는 기억에 매달려 혼자 큰 것처럼 얼마나 의기양양 했는지, 엄마가 되어서야 엄마를 생각한다.
온통 나로 가득했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세 아이의 우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엄마의 걱정과 염려 덕분 이였다. 당연한 것들은 당연하지 않다.
오늘은 엄마와 데이트를 해야겠다. 엄마가 좋아하는 국수집에 가도 좋고 가을의 국화를 보러가도 좋을 것이다. 나에게만 미화되는 장면 말고 엄마와 내가 함께 많이 웃는 장면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