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대학교 석사 유학장학생이 된 행운

나의 유학기이야기 시리즈

by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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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장교 출신이자 월남참전용사이시기도 한 자랑 스런 아버지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셨다. 군인의 박봉으로 매일 여유가 없는 생활을 했지만, 우리 형제들은 서로 의지를 하며 콩한개라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순종을 하며 성장을 했다.


큰형과 작은형은 1년 차이, 작은형과 나는 2년 차이, 나와 남동생은 3년 차이 그리고 막내 여동생과 넷째는 4년 차이였다. 한때 대학생이 3명이 되는 등 극도로 군인 월급으로는 생활이 안 되는 위기는 있었지만, 나도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장학금을 받는 등 다행히 대학교는 졸업을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영어도 배우고, 고기도 먹고, 샤워라는 것도 하고, 육체적 부담이 적다는 이유로 희망하던 카투사 시험에도 합격을 해서 편안한(?) 군 생활도 했다. 아버지는 해병대를 가라고 했는데 자식들 중 여러 이유로 해병대를 간 아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서운해하셨다. 시력 때문에 해병대를 못 간 나는 비록 카투사이지만, 자대인 용산에서 멀리 떨어진 판문점 일대 파견을 자청했다. 자유를 다리를 건너야 했고, JSA라는 지역과는 가장 인접한 통신시설 내에 있는 교환대에서 근무를 했다.


카투사 재직시인 젊은 나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작은 사업이지만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박스제조 공장도 자금난으로 폐쇄를 하고, 아버지는 혼자서 너희를 돌볼 수가 없으니 어서들 결혼들을 해라라고 강권(?)을 하셨다. 1988년 나는 운 좋게도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회사로 추천하셨고, 내가 어릴 적 놀던 포항바닷가에 지어진 끝없이 긴 제철소를 가진 POSCO 공채에 합격을 했다. 우연히 당시에 살던 시흥동에 친구가 운영하던 독서실이 있었는데, 나는 저녁에 독서실을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약 6개월을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시흥동 일대에 역사적으로 큰 홍수가 난 사실도 모르고 막힌 공간인 독서실에서 밤낮으로 취업공부를 했다.

그리고, 같이 시험을 친 도서관 주인은 낙방을 하고, 나만 운 좋게 포항종합제철, 포철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사실 POSCO 입사 후 받은 월급의 90%를 저축을 하고 분기마다 기본급의 100%가 나오는 보너스와 특별격려금 등으로 생활을 했다. 중간중간 문제가 생기면 동기들에게 돈을 꾸고 다시 한 달 후에 갚고 하는 식의 돌려 막기를 하곤 했는데, 다행히도 1명의 동기가 매번 그 일을 도와주었다. 그는 내가 보스턴 유학시절 생활비로 고생할 때도 또 운 좋게 그 친구가 뉴욕사무소에 주재를 하게 되어, 다시 구세주 역할을 해주었다. 이런 착한 성품에 그는 POSCO 임원으로 승진을 했고 지금도 인생의 은인으로 잘 만나고 있다.


나는 카투사 기간을 포함해서 집사람과 약 6년을 사귀었고, 만남 후 이별을 하는 순간들이 싫어지는 단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처갓집도 장인어른이 되실 분이 은퇴 후 1년도 안되어 상실감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나는 생전에 한번, 그리고 운구를 하면서 장인어른을 두 번을 뵙고 아쉬운 이별을 했다. 혼자서 자식들을 부양하는 부담을 가지신 장모님은 결혼할 준비가 부족한 나와의 결혼을 반대하셨고, 의사 사위 만을 고집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년 후에는 서울에서 근무를 할 것이라고 거짓(?) 말을 하고, 본사가 있는 포항에서는 잠시 있을 것이니 월세로 살겠다고 설득을 해서 다행히 통과가 되었다.


나는 POSCO에 입사해 1년간 모운 돈으로 결혼비용도 마련하고, 포항에 90만 원 보증금에 월 9 만정도하는 월세를 구할 수 있었다. 작은 형이 결혼 날짜를 발표하자, 나는 갑작스레 작은형이 잡은 예식장에서 30분은 작은형, 나머지 30분은 내가 하는 동시상영 결혼식을 제안했다. 다행히 형과 형수가 동의를 해주어서, 우리는 결혼을 할 수 있었고, 급하게 날자를 잡은 이유로 신혼여행도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만 있었고, 공항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신랑/신부들만을 전용으로 사업을 하는 봉고차 사업자가 소개해주는 숙소와 일정으로 신혼여행도 마쳤다.


고작 1년간의 급여를 전부 모았지만, 아무리 포항이라도 그 수준으로 구할 전셋집은 없었고, 다행히도 회사인근에 POSCO 직원들을 상대로 하는 월세 집들이 많아 그중에 하나를 골랐다. 그 집은 대문을 거쳐, 부엌을 통해서 들어가는 방 한 칸이 고작이었는데, 부엌은 아궁이, 연탄, 수돗물 시설 등 식당과, 샤워장, 세탁실, 창고 등 겸용 공간이었다. 그리고 귀뚜라미가 자주 나오는 등 지금도 집사람에게 미안한 그런 집이었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나고, 엄마를 찾는 아이가 방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가끔 떨어지는 일도 벌어지고, 더욱이 아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가 퇴근 후 유학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 책을 만지는 등 방해꾼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아이는 책을 참 좋아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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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시절 해외유학을 간다고 인사를 하는 주변의 지인들이 많았는데, 이때 유학이란 두 글자를 동경하게 되었다. 물론 부잣집 출신이 아닌 나에게는 그럴 일이 없다고 용기는 접었지만, 미련은 버리지 않았었다. 하루는 POSCO 서울사무소에서 내가 하는 국제철강단체 업무의 파트너이자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인 회사 선배가 포항으로 내려와서 우리 조사부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어디를 가시느냐 했더니, POSCO가 보내주는 유학을 간다고 하면서 후배님도 내년에 도전을 해보라고 했다.


그때 다시 유학이라는 불씨가 살아 올랐고, 나는 다음 해에 SKY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해서 외대출신으로 최초로 POSCO 사내 유학시험에 당첨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승리는 포기하지 않는 자가 쟁취하는 것,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었다. 나는 지금도 큰 아이 탄생 덕분에 유학시험에 합격을 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이유로 100일과 돌 사진도 남겨주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나는 유학을 떠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으므로, 방 두 칸으로 이사를 결정하고 보증금 90만 원에 10만 원 월세에서, 무려 150만 원에 월 15만 원 월세로 이사를 했다. 방 두 칸에 마루 그리고 연탄보일러 시설이 있는 집이었는데, 삶의 질이 너무 급하게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그리고 연탄가스 사고 걱정도 사라졌다. 문제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진 것. 결국 집사람이 방 한 칸을 다시 월세를 놓아서, 일부라도 월세부담을 덜었고, 마루가 졸지에 작은방 역할을 하게 되었고, 나는 안방에서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보스턴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우리 3명의 가족은 손을 꼭 잡고 김포공항을 떠나 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었다. 보스턴 도착 후, 첫 일주일은 먼저 MIT로 단기 연수를 온 POSCO 선배가 사는 한인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Cambridge란 도시로 하버드와 MIT가 있으며 보스턴대학교와는 다리 하나를 건너면 되는 지역이다. 나는 학교 근처에 사는 것이 월세로는 더 비싸지만, 시간과 교통비를 감안할 때 더 저렴한, 학교가 제공하는 가족기숙사를 구했다. 당시 월세가 850불이었는데 (1 bed room), 유학 지원 비용은 월 1060불이어서, 비용의 대부분이 월세로 나가고 나머지는 학용품 등으로 사용하고 나면 항상 생활비는 항상 적자였다. 반면 중부 등 지방(?)으로 유학을 간 우리 유학기수들은 500불대의 2 bed room 집을 구해서 생활을 해서 무난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치 내가 850불을 내고 어마 어마 하게 크고 시설이 좋은 아파트에 살 거라고 유추를 하는 시선들도 많았다.


나는 방학 때 그들이 보스턴을 여행을 오면 호텔을 잡지 말고 우리 집에서 자기를 청했는데, 다들 승낙을 한 것을 보니, 보스턴지역은 모델도 하루에 300불이나 하는 등 모든 물가가 비싸다는 것도 경험하게 하고, 더욱이 내가 사는 집이 실상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물론 여자들은 하나뿐인 안방에서, 남자들은 소주도 마시면서 거실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나의 생활상을 안 그들은 보스턴을 떠나면서, 담배, 쌀 등 자신들이 준비해 온 물품들을 많이 남겨주고 떠났다.


난 그때 왜 담배는 끊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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