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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쿠바의 태양 아래서 럼을 마시다

다이키리와 모히토에 담긴 '하드보일드' 철학

by 박정수

우리는 왜 어떤 술에 유독 끌리는가. 단순히 맛과 향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는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 술에 담긴 '이야기'와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 술을 사랑했고, 술을 썼으며, 스스로 술의 아이콘이 된 작가들의 이야기가 있다. [작가와 술] 시리즈는 그 첫 번째 잔으로, 누구보다 거칠고 뜨거운 삶을 살았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잔을 채우려 한다.

1. 아바나의 두 성전(聖殿), 두 개의 칵테일

"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 (나의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에, 나의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디타에)


쿠바 아바나(Havana)의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 바 벽면에 남아있는 이 유명한 문구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라는 거대한 아이콘을 상징하는 주문이 되었습니다. 관광객을 끌기 위해 바 측에서 지어낸 말이라는 논란도 있지만,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헤밍웨이가 이 두 칵테일을 지독히 사랑했으며, 아바나의 이 두 바를 자신의 '성전'처럼 여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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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하필 '럼(Rum)'이었을까? 그리고 왜 '다이키리'와 '모히토'였을까?

1939년, 헤밍웨이는 쿠바 아바나 외곽의 저택 '핀카 비히아(Finca Vigía)'에 정착합니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노인과 바다>를 집필한 곳이자, 그의 인생 후반기 20년을 보낸 곳입니다. 작열하는 쿠바의 태양, 거친 멕시코 만류가 흐르는 바다, 그리고 사탕수수로 만든 해적의 술 '럼'. 이 모든 것은 '파파(Papa)'라 불리길 좋아했던 이 거구의 미국인 작가에게 완벽한 무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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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술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진통제였고, 남성성을 증명하는 도구였으며, 궁극적으로는 그의 '하드보일드(Hard-boiled)' 문학과 철학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었습니다.



2. 다이키리(Daiquiri): 설탕을 거부한 '남자의 술'

헤밍웨이가 다이키리를 마시기 위해 매일같이 들렀던 '엘 플로리다 타(El Floridita)' 바에는 지금도 그의 실물 크기 청동상이 바의 구석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의 바텐더 콘스탄티노 리발라이과(Constantino Ribalaigua)와 각별한 사이였고, 그를 위해 특별한 레시피가 탄생했습니다.

"설탕은 빼고, 럼은 두 배로(No sugar, Double rum)."

이것이 바로 '파파 도블레(Papa Doble)' 혹은 '헤밍웨이 스페셜'이라 불리는 칵테일의 핵심입니다.

다이키리의 기본: 럼, 라임 주스, 설탕.

헤밍웨이 스페셜: 럼 2배(더블), 라임 주스, 자몽 주스, 마라스키노 리큐어(체리 리큐어), 그리고 설탕은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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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설탕을 뺐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당뇨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단맛'을 경멸했습니다. 그에게 단맛은 불필요한 감상(感傷)이자 나약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의 문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모든 문장의 첫 문장은 진실해야 한다." 그는 군더더기를 병적으로 싫어했습니다. 미사여구와 감정적 수사를 걷어내고, 문장의 뼈대(사실)만을 남기는 것. 이것이 그 유명한 '빙산 이론(Iceberg Theory)'입니다. 물 위에 떠오른 1/8의 사실을 정확히 묘사하면, 물아래 잠긴 7/8의 진실(감정, 상징)은 독자가 스스로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파파 도블레'는 정확히 그의 문체를 닮았습니다. 설탕이라는 감미료를 제거하고, 럼이라는 알코올의 '사실(Fact)'을 두 배로 강화합니다. 라임과 자몽의 날카로운 산미는 문장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마라스키노 리큐어는 아주 미묘한 여운만을 남깁니다. 이것은 '맛있는' 칵테일이기 이전에, '헤밍웨이적인' 칵테일입니다. 그는 이 독한 술을 하루에 10잔 넘게 마시며 자신의 마초성을 증명하고, 동시에 현실의 고통을 마취시켰습니다.


3. 모히토(Mojito): 삶의 긍정과 '깨끗하고 불 밝은 곳'

만약 헤밍웨이가 '파파 도블레'의 날카로움만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그저 그런 마초 작가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모히토'라는 정반대의 칵테일 또한 사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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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보데기타'에서 즐겨 마신 모히토는 럼, 라임, 설탕, 그리고 '민트'와 '소다수'가 들어갑니다. 다이키리가 응축된 남성성이라면, 모히토는 청량감과 낭만, 즉 삶에 대한 긍정입니다.


민트 잎을 으깨어 넣는 행위(Muddling)는 억눌린 향을 폭발시킵니다. 여기에 럼의 알코올과 라임의 산미, 설탕의 달콤함, 그리고 소다수의 청량감이 어우러집니다. <노인과 바다>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망망대해에서 겪는 고난 속에서도 "새는 좋겠다"며 작은 생명에 경의를 표하고, 결국은 "사자 꿈"을 꾸는 그 낭만적 의지가 모히토 한 잔에 담겨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깨끗하고 불 밝은 곳(A Clean, Well-Lighted Place)>은 그의 '바(Bar) 철학'을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늦은 밤, 잠들지 못하는 노인이 불 밝은 카페에 앉아 술을 마십니다. 젊은 웨이터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이 든 웨이터는 그를 이해합니다. 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술이 아니라, '무(Nada)'와 '혼돈(Chaos)'으로 가득 찬 어두운 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질서 있고 깨끗하며 불 밝은' 장소 그 자체입니다.


헤밍웨이에게 '엘 플로리다 타'와 '라 보데기타'는 단순한 술집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전쟁의 참상과 실존적 고뇌라는 '어둠'을 피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깨끗하고 불 밝은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정해진 레시피(질서)에 따라 만들어진 칵테일을 마시는 '의식(Ritual)'을 통해, 삶의 무의미함과 싸울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려 했습니다.



4. 헤밍웨이를 마신다는 것 (마무리)

헤밍웨이는 결국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쌓아 올린 '강인한 남성'의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그 자신을 옭아매는 덫이 되었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럼'은 구원이자 동시에 파멸의 도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헤밍웨이를 기억하며 다이키리나 모히토를 마시는 행위는, 단순히 그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문학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삶의 거대한 공허함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구축했던 '철학'과 '스타일'을 한 잔의 액체로 음미하는 행위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번 주말, 헤밍웨이의 책 한 권을 펼쳐놓고 그가 사랑했던 칵테일 한 잔을 곁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설탕을 뺀 '파파 도블레'의 강렬함 속에서 그의 고독한 문장을 만나거나, 혹은 민트 향 가득한 모히토의 청량함 속에서 <노인과 바다>의 낭만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부록] 헤밍웨이의 칵테일 레시피

독자분들이 집에서 직접 '파파'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국제 바텐더 협회(IBA)의 공식 레시피를 기반으로 한 두 칵테일 레시피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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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밍웨이 스페셜 (파파 도블레 변형)

재료: 화이트 럼 60ml, 자몽 주스 40ml, 마라스키노 리큐어 15ml, 라임 주스 15ml

만드는 법:

모든 재료를 셰이커에 얼음과 함께 넣습니다.

강하게 쉐이킹 한 후, 얼음을 걸러내고 차갑게 식힌 칵테일 잔에 따릅니다.

Tip: 헤밍웨이의 오리지널 '파파 도블레'는 럼 4온스(약 120ml)가 들어간 극도로 강한 술이었습니다. 위 레시피는 현대적으로 마시기 쉽게 조절된 버전입니다.

2. 모히토 (Mojito)

재료: 화이트 럼 45ml, 라임 1/2개(웨지 모양), 민트잎 6-8장, 백설탕 2 티스푼, 탄산수

만드는 법:

길쭉한 하이볼 글라스에 라임 웨지와 설탕을 넣고 가볍게 으깨어 즙을 냅니다.

민트 잎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 쳐서 향을 깨운 뒤 잔에 넣습니다. (너무 짓이기면 쓴맛이 납니다)

잔에 얼음을 채우고 럼을 붓습니다.

나머지 공간을 탄산수로 채운 뒤, 바 스푼으로 가볍게 저어 설탕을 녹입니다.

민트 잎과 라임으로 장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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