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위대한 개츠비>의 진, <닥터 지바고>의 보드카, <대부>의 위스키를 통해 서양 문학 속에 흐르는 술의 서사를 탐구해 왔습니다. 서양 문화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바커스)'가 상징하는 것이 종종 이성의 해체, 광기, 그리고 비극적인 파괴라면, 동양의 술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동양, 특히 한시(漢詩)의 세계에서 술은 자연과의 합일(合一), 세속의 초월, 그리고 '풍류(風流)'라는 고차원적인 미학으로 승화됩니다.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입니다. 시선(詩仙, 시의 신선)이라 불리는 그는 동시에 스스로를 '주중선(酒中仙, 술 취한 신선)'이라 칭했습니다. 그에게 술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마취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중력처럼 무거운 세속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정신을 비상(飛翔)시켜 우주와 소통하게 만드는 '날개'였습니다.
본 에세이는 [술의 향기가 문학과 예술에 흐를 때] 일곱 번째 여정으로, 동양 미학의 정수인 이백의 삶과 시를 조명합니다. 그가 마셨던 곡주(Grain Wine)의 따뜻한 물성, 고독을 우주적 파티로 승화시킨 명시 <월하독작(月下獨酌, 달빛아래 홀로 술을 따른다)>, 그리고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별이 되었다는 그의 전설적인 최후를 통해, 우리는 술 한 잔에 담긴 동양적 낭만의 극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이백이 마셨던 술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중국 술이라 하면 50도가 넘는 투명하고 독한 '고량주(백주)'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증류 기술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당나라 시대의 술은 오늘날의 독주와는 달랐습니다.
이백이 사랑했던 술은 쌀이나 기장을 발효시켜 만든, 오늘날 우리의 '막걸리(탁주)'나 맑게 거른 '동동주'나 '청주(淸酒)'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서양의 와인이 뜨거운 태양을 머금은 포도(과실)로 빚은 '태양의 술'이라면, 동양의 술은 대지의 기운을 받고 자란 곡물로 빚은 '땅의 술'입니다.
이 곡주(Grain Wine)는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은근하고 부드럽게 취기가 오르며, 마실수록 배가 든든해지는 '곡기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이백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금준미주(金樽美酒, 금색술잔에 담긴 아름다운 향의 술)'는 황금 항아리에 담긴 아름다운 술이라는 뜻이지만, 그 본질은 자연이 준 곡물을 사람이 정성껏 빚어낸 '땅의 젖'이었습니다.
춘향전에도 이몽룡 대사가 기억나죠?
金樽美酒 千人血 (금준미주 천인혈,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백성의 피요)
玉盤佳肴 萬姓膏 (옥반 가효 만성고,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따라서 이백의 취기는 난폭하지 않습니다. <대부>의 위스키가 차가운 이성을 날카롭게 벼려낸다면, 이백의 청주는 경직된 이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따뜻한 감성과 직관을 채웁니다. 그는 이 부드러운 술을 통해 인간 사회의 엄격한 유교적 질서와 관료제의 답답함을 잊고,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자연과 내가 한 몸체이다)'의 경계로 나아갔습니다.
이백의 술과 풍류가 절정에 달한 작품은 단연 <월하독작(月下獨酌, 달 아래 홀로 술을 따른다)>입니다.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花間一壺(술병)酒, 화간일호주)
친한 이 없이 홀로 마시네 (獨酌無相親, 독작무상 친)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니 (擧杯邀(맞이할요)明月, 거배요명월)
그림자와 더불어 셋이 되었네 (對影成三人, 대영성삼인)"
이 시의 도입부는 인문학적으로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독작(獨酌)', 즉 혼자 술을 마시는 행위는 통상적으로 처량하고 고독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백은 이 절대 고독의 순간을 기발한 연출로 뒤집어버립니다.
그는 하늘의 '달(Moon)'을 초대하고, 땅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Shadow)'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하여 술자리는 혼자가 아니라, '나(자아) + 달(자연/이상) + 그림자(현상/현실)'가 어우러진 셋의 파티가 됩니다.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그저 흉내만 낼뿐이지만..."이라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그는 이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내가 노래하니 달은 서성거리고, 내가 춤을 추니 그림자는 어지럽구나." 이 장면에서 술은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허무는 매개체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술주정이 아닙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고독을 비관하는 대신, 온 우주를 술친구로 삼아버리는 거대한 기개(氣槪)이자 낭만입니다. 그는 술을 통해 고독을 '우주적 교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백에게 술잔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바다였고, 그 안에 뜬 달은 그가 닿고자 했던 이상향이었습니다.
이백의 삶을 완성하는 것은 그의 죽음에 얽힌 전설입니다. 야사(野史)에 따르면, 만년의 이백은 채석강(채석기)에서 배를 띄우고 술을 마시다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 물에 뛰어들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물론 정사에서는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문학적으로 이 전설은 이백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엔딩(Ending)입니다.
술에 취해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 했다는 행위는, 그가 평생 추구했던 삶의 태도를 상징합니다. 하늘에 있는 달이 닿을 수 없는 '이상(Ideal)'이라면, 강물에 비친 달은 그 이상의 '환영(Illusion)'이자 '예술(Art)'입니다. 그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현실의 육체를 버리고, 술기운을 빌려 그 환영 속으로, 즉 영원한 미(美)의 세계로 뛰어든 것입니다.
일반인의 눈에 이는 '익사'라는 비극적 사고일지 모르지만, 시인의 눈으로 볼 때 이는 '등선(登仙,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름)'의 과정입니다. 그는 중력이라는 현실의 무게를 거스르고, 달을 품에 안음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다시 별이 되었다고 믿고 싶어 했습니다.
이백이 보여준 술의 미학은 한마디로 '풍류(風流)'입니다. 바람 풍(風), 흐를 류(流). 바람처럼 막힘없이 흐르고, 물처럼 자연스럽게 사는 삶. 술은 그 흐름을 돕는 윤활유였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술이 '욕망'이었고, <닥터 지바고>의 술이 '생존'이었으며, <대부>의 술이 '권력'이었다면, 이백의 술은 '해방(Liberation)'이었습니다. 그는 술잔에 뜬 달을 마시며 정치적 패배도, 늙어감의 서러움도, 인간의 유한함도 모두 웃음으로 넘겨버렸습니다.
[술의 향기가 문학과 예술에 흐를 때] 7편을 맺으며, 오늘 밤 우리는 막걸리나 맑은 청주 한 잔을 앞에 두고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팍팍한 도시의 삶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술이 아니라, 술잔에 달을 띄울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가 아닐까요?
천 년 전, 달과 그림자를 친구 삼아 춤을 추었던 그 주선(酒仙)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술잔의 물결 위에 어른거립니다.
"자, 한 잔 받으시게. 오늘 밤은 달빛이 참으로 좋으니 말일세."
오늘 서양의 술과는 또 다른, 그윽하고 깊은 '풍류'의 맛이 느껴지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