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편에서 우리는 이백(李白)과 함께 달빛 아래서 맑은 청주를 마시며 중력을 거스르는 '풍류'를 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구름 위에서 내려와, 중국 산둥성(山東省)의 척박하고 붉은 대지 위에 두 발을 딛습니다. 이곳에는 신선이 마시는 이슬 같은 술은 없습니다. 대신, 거친 사내들의 땀방울과 여인의 눈물, 그리고 민중의 붉은 피가 뒤섞인 독하고 뜨거운 술, '고량주(高粱酒)'가 흐르고 있습니다.
2012년 중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모옌(Mo Yan)의 대표작 <붉은 수수밭(Red Sorghum)>은 바로 이 술 냄새 진동하는 소설입니다.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화하여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작품에서,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닙니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수수밭을 배경으로 빚어지는 이 투명한 독주(毒酒)는 중국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이자, 침략자에 맞서는 저항의 불꽃이며,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해방시키는 '대지의 피'입니다.
본글은 [술의 향기가 문학과 예술에 흐를 때] 여덟 번째 여정으로, 오늘날 마오타이(Moutai)나 수정방(Shui Jing Fang) 같은 세계적 명주로 발전한 중국 백주(白酒, Baijiu)의 원형을 탐구합니다. 식도를 태울 듯한 그 뜨거운 작열감(Fire) 속에 숨겨진 중국 문학의 붉은 미학을 만나보겠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1920~30년대 중국 산둥성 가오미(高密) 동북향. 이곳의 주식(主食)이자 풍경의 전부는 붉은 수수(Sorghum)입니다. 주인공 '나의 할머니(지우얼)'와 '나의 할아버지(위잔아오)'는 이곳의 양조장을 배경으로 운명적인 사랑과 삶을 엮어갑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술 '18리 고량주(十八里紅)'는 그 이름부터 웅장합니다. 술 향기가 18리 밖까지 퍼진다는 뜻입니다. 이 술을 만드는 과정은 고도의 노동 집약적이며, 신성한 의식(Ritual)에 가깝습니다. 웃통을 벗어젖힌 건장한 사내들이 붉게 익은 수수를 찌고, 누룩을 섞어 발효시키고, 증류하여 항아리에 담는 과정은 그 자체로 역동적인 생명의 춤입니다.
왜 중국의 술, 특히 백주는 독할까요? 마오타이나 수정방을 마셔본 분들은 알겠지만, 보통 50도를 훌쩍 넘깁니다. 이는 중국의 기름진 음식 문화를 씻어내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대륙의 혹독한 환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산둥성의 매서운 겨울바람과 고된 노동을 견디기 위해, 민초들에게는 뱃속을 뜨겁게 데워줄 '액체로 된 불'이 필요했습니다.
<붉은 수수밭>의 술은 세련된 사교의 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입안에 털어 넣는 순간 식도에서 위장까지 불길이 지나가는 길을 확인시켜 주는, 가장 남성적이고 원초적인 에너지의 응축입니다.
이 작품을, 그리고 중국의 백주 문화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색채는 '붉은색(Red)'입니다. 모옌은 붉은색의 이미지를 통해 생명과 죽음, 그리고 술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첫째, 붉은 수수는 대지의 끈질긴 생명력입니다. 둘째, 붉은 술(고량주)은 인간의 끓어오르는 욕망과 취기입니다. 셋째, 붉은 가마는 여주인공의 기구한 운명과 전통의 굴레입니다. 넷째, 붉은 피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대지에 뿌려지는 민중의 희생입니다.
특히 영화와 소설의 하이라이트인 양조장의 제사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신(酒神)에게 제사를 지내며 사내들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바로 주인공이 갓 빚은 술항아리에 오줌을 누는 장면입니다.
위생 관념으로 보면 경악할 일이지만, 문학적 상징(Symbolism)으로 보면 이는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의 주입'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이 항아리의 술은 기가 막힌 맛으로 숙성되어 '18리 고량주'의 전설이 됩니다. 이는 중국 백주가 단순한 화학적 공정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체취와 기운, 즉 '양기(陽氣)'가 서려야 비로소 명주가 된다는 민간 신앙적 믿음을 보여줍니다.
일본군이 침략했을 때, 양조장의 인부들은 이 술항아리에 화약을 섞어 '화염병'을 만듭니다. 사람을 취하게 했던 술은 이제 적을 태워 죽이는 무기가 됩니다. 수수밭에 뿌려진 붉은 술과 붉은 피는 서로 구분되지 않고 섞여 대지로 스며듭니다. 모옌에게 술은 곧 피였고, 피는 곧 술이었습니다.
소설 속 투박한 '18리 고량주'는 오늘날 우리가 면세점이나 고급 중식당에서 만나는 '마오타이(Moutai)'나 '수정방(Shui Jing Fang)'의 거친 조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명주들은 중국 백주의 두 가지 큰 줄기를 대변합니다. 마오타이는 붉은 수수를 원료로 하되, '장향(醬香)'이라 하여 구수한 간장 향과 흙내음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깊은 맛을 냅니다. 이는 수차례 찌고 발효하는 고된 과정을 거친 '숙성의 미학'입니다. 반면 수정방이나 우량예는 '농향(濃香)'이라 하여, 마시는 순간 파인애플이나 꽃향기 같은 화려하고 짙은 향이 폭발합니다.
<붉은 수수밭>의 인물들이 겪었던 전쟁과 혁명, 기근의 역사는 역설적으로 중국 술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백주의 특징은 도수는 높지만 숙취가 적고 뒤끝이 깨끗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불순물을 걸러내고 알코올의 순도를 극한으로 높인 결과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중국인들의 삶의 태도와 닮아있습니다. 역사적 고난(독한 알코올)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그 끝에 남는 것은 군더더기 없는 생존 본능과 화려한 향기(명주)라는 점 말입니다. 모옌의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도, 그 거친 흙냄새 속에 인류 보편의 생명력을 담아냈기 때문이듯, 마오타이가 국주(國酒)가 된 이유 역시 그 한 방울에 중국의 땅과 역사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붉은 수수밭>의 마지막, 붉은 태양이 수수밭 위로 떠 오르고 살아남은 자들은 다시 삶을 이어갑니다. 그들에게 술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이백(李白)처럼 달을 잡으려는 낭만이 아니었습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운명 앞에서 오늘을 가장 뜨겁게 살게 해주는 '연료'였습니다. 백주 한 잔을 목에 털어 넣을 때 느껴지는 그 타는 듯한 작열감은, 척박한 땅에서도 기어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붉은 수수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은 민초들의 뜨거운 심장 박동과 같습니다.
[술의 향기가 문학과 예술에 흐를 때] 14편을 마무리하며, 혹시 기회가 되신다면 투명한 백주 한 잔을 따르고 그 향을 깊이 들이마셔 보시길 권합니다. 그 강력한 향기 속에서 붉은 수수밭을 흔드는 바람 소리와, 거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술을 마셔라. 그리고 붉게 타올라라." 모옌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