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과 막걸리-"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by 박정수

I. 서론: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가장 맑은 시심(詩心)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각국의 명주와 대문호들의 이야기를 탐험했습니다. 오늘은 또 화려하지 않은 술, 그러나 우리 민족의 애환과 가장 닮아있는 술 '막걸리' 앞에 다시 섰습니다. 그리고 그 낡은 주전자 곁에는 평생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이 세상 소풍이 아름다웠다"라고 노래한 '동심(童心)의 시인', 천상병(千祥炳)이 웃고 있습니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아이 같은 지능과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 했던 시인. 그에게 세상은 지옥일 법도 했건만, 그는 원망 대신 시(詩)를 쓰고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그에게 막걸리는 <위대한 개츠비>의 향락도, <대부>의 권력도, 이백의 호탕한 풍류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끼니를 대신하는 '양식(밥)'이었고, 망가진 몸의 통증을 달래주는 '약'이었으며, 이승에서의 소풍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장난감'이었습니다. 본고(本稿)는 [술의 향기가 문학과 예술에 흐를 때] 10번째 여정으로, 욕심 없는 삶(無慾)과 막걸리 한 잔이 빚어낸 천상병 시인의 순백색 문학 세계를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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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본론 1: 밥 대신 마신 술,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다"

천상병 시인의 기행(奇行)은 문단에 전설처럼 내려옵니다. 그는 지인들에게 어린아이처럼 손을 내밀며 "오백 원만 다오, 백 원만 다오"라고 했습니다. 그가 구걸하듯 모은 그 동전들의 종착지는 언제나 막걸리 집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던 찻집 '귀천(歸天)'이나 종로의 허름한 술집에서, 그는 하루 종일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혀를 찼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에게 막걸리는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었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소화 기능이 약해진 그에게, 씹지 않고도 넘길 수 있고 마시면 배가 부른 막걸리는 말 그대로 '액체로 된 밥'이었습니다.

그는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이다"라고 예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모닝커피 대신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켰다는 일화는 그에게 술이 생존을 위한 연료였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취기는 난폭하지 않았습니다. 술에 취하면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거나, 세상 짐을 다 내려놓은 듯 깊은 잠에 빠질 뿐이었습니다. 뽀얀 막걸리 빛깔처럼, 그의 취함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무구(無垢)한 취기'였습니다.


III. 본론 2: <귀천(歸天)> - 소풍 온 아이의 빈 도시락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귀천(歸天)>은 막걸리의 미학, 즉 '비움'과 '순수'의 철학이 절정에 달한 작품입니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출처] 천상병 귀천 : 하늘로 돌아감을 뜻하며 삶과 죽음에 대한 달관적 태도를 노래한 시|작성자 지식특급


천상병 귀천 : 하늘로 돌아감을 뜻하며 삶과.. : 네이버블로그


이 시에서 그는 삶을 고통이나 형벌이 아닌 '소풍(Picnic)'이라고 정의합니다. 소풍을 나온 아이는 빈손으로 왔다가, 실컷 놀고, 해가 지면 다시 빈손으로 집(하늘)으로 돌아갑니다.

새벽빛, 이슬, 노을, 구름, 기슭, 소풍... 이 단어들은 모두 무게가 없는 것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들이에요. 천상병은 죽음을 무겁게 말하지 않아요.


그리고 귀천은 기독교·천주교에서 죽음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에요.

“주님 품으로 돌아갔다”

“하늘나라로 갔다”

“하느님께 귀향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귀천(歸天)과 정확히 맞닿아 있어요.

천상병이 말한 ‘하늘’은 영혼의 본향인 하늘로 귀향한다는 개념과 자연스럽게 겹칩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소풍을 왔다가 즐기고, 엄마가 계신 집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귀천이고, 이 의미는 결국 죽음보다는 소풍에서 그려진 즐거웠던 삶을 더 아름답게 바라보게 만드는 시각입니다.


그리고 막걸리는 이 소풍의 가장 훌륭한 동반자였습니다. 와인처럼 복잡한 예절도, 위스키처럼 비싼 값도 필요 없는 술. 찌그러진 양은 잔에 가득 부어 꿀꺽꿀꺽 마시면 그만인 술. 천상병에게 막걸리는 소유욕 없는 그의 삶을 대변하는 매개체였습니다.


그는 평생 집도,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그 인세가 얼마인지조차 몰랐습니다. 그저 오늘 마실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행복해했습니다. 빈 도시락을 달그락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처럼, 그는 막걸리 한 잔에 세상의 모든 욕망을 털어버리고 오직 '아름다움'만을 기억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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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본론 3: 가난과 고통을 발효시킨 '순백의 미학'

막걸리는 발효의 술입니다. 쌀과 누룩이 어두운 항아리 속에서 끓어오르고 삭히는 시간을 견뎌야 비로소 향긋한 술이 됩니다. 천상병의 삶 또한 그러했습니다.

1967년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의 6개월. 전기 고문과 물고문이라는 지옥을 겪으며, 엘리트였던 서울대 출신 청년의 몸과 정신은 처참하게 부서졌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고통의 시간은 그의 내면에서 썩거나 부패하지 않고, 막걸리처럼 맑고 시큼하게 발효되었습니다.

그는 가해자들을 증오하거나 복수를 다짐하는 대신, 새와 꽃과 아이들을 노래했습니다. 그의 시 <새>, <행복> 등에는 악의(惡意)가 거세된 순수한 언어들이 가득합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 내 영혼의 빈터에 / 새가 날고 꽃이 피고 / 득음에의 노래가 공명하리라" (<새> 중에서)

어쩌면 막걸리의 그 텁텁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 그리고 마시고 나면 찾아오는 몽롱한 망각이 그 발효의 촉매제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막걸리라는 여과 장치를 통해 세상의 독(毒)을 걸러내고, 가장 순수한 시어(詩語)들만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의 술 냄새는 알코올 냄새가 아니라, 고통을 이겨낸 영혼의 향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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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결론: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그가 남긴 건배사

1993년 봄, 천상병 시인은 그토록 그리던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던 그의 약속대로, 그는 하늘나라에서도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며 옥황상제에게 지구 소풍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천상병의 막걸리 잔을 들여다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났던 수많은 술은 때로는 쾌락을, 때로는 권력을, 때로는 고독을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천상병의 막걸리는 우리에게 '화해(和解)'와 '감사(感謝)'를 가르쳐줍니다.

비록 가진 것 없고, 몸은 아프고, 세상은 불공평할지라도, 막걸리 한 잔 마실 수 있는 오늘이 있다면, 그리고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이 삶은 충분히 '아름다운 소풍'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요즘 저도 와인이나 독한 위스키 대신, 편의점에서 파는 하얀 서울막걸리를 사는데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이 생각나곤 합니다.


"그래, 오늘 하루도 참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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