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1955년 3월 17일.
봄기운이 완연(宛然)했다. 꽃다발을 든 여학생들도 꽤 눈에 띄고, 자가용 승용차(乘用車)도 눈에 띄었다. 제9회 졸업식이 강당에서 거행(擧行)된 것이다. 이날따라 강당(講堂) 벽에 걸린 페스타로치(Pestalozzi)와 이퇴계(李退溪)의 대형 초상화(肖像畵)가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평균 92.3점의 우수한 성적으로 우등상(優等賞=國漢大辭典)을 받으며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횃불사장의 공로(功勞)를 인정받아 공로상도 함께 받았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식은 끝났으나 나는 참 쓸쓸했다. 아무도 축하(祝賀)해주는 사람 없이, 묵묵(黙黙)히 있다가 교실(敎室)로 돌아와 담임 윤홍섭(尹洪燮) 선생님께 작별 인사하는 것만으로 교실을 빠져 나왔다. 교실 정면(正面)의 ‘지성(至誠)’이라는 교훈(校訓)과 본관 앞 바위에 새겨진 ‘날로 새로워라’는 글귀만을 마음에 새긴 채 학교 뒷산으로 향하였다.
무등(無等)뫼 솟는 햇살 첫 빛을 받아
빛나는 우리 학원 광주 사범.
들어라 새 세대의 맥박이 뛴다.
힘차게 자라나는 세기의 요람.
6년 동안 불러온 모교(母校) 사범학교의 교가(校歌)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방안의 찬 냉기(冷氣)가 콧날을 싸늘하게 하였다. 지금쯤 다른 학우들은 삼삼오오(三三五五) 음식점에 둘러앉아 지난 추억(追憶)들로 곱게 물든 웃음꽃을 피우며 이야기 보따리를 펴놓고 있으리라. 잔디 위에서, 향나무와 회양목이 어우러진 현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가슴들을 활짝 펴고 있으리라.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사범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남과 같은 그런 호사(豪奢)스런 졸업식을 해보지 못했다.
이 곳에서 6.25를 겪었다. 이 곳에서 사춘기(思春期)를 보냈다. 이 곳에서 청춘(靑春)을 불살랐다. 6년 동안의 자취(自炊) 생활과 고학(苦學) 생활! 굶주림과 헐벗음, 땀과 눈물!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모조리 겪으면서 이제 교문(校門)을 나선 것이다.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다! 지난날에 얽매이다니...나에겐 푸른 꿈이 있는데...’
우리가 나서는 저 사회도 형극(荊棘)의 길이요 광야(曠野)의 길이라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희망봉(希望峰)이 솟아있지 않는가? 시간이 금(金)인 나는 절규(絶叫)하듯이 책을 들었다. 법학, 경제학...
그런데 이튿날 학교에서 불렀다. 서울로 가고 싶지 않느냐는 것이다. 수복(收復) 직후(直後)라 서울에는 교사가 부족하여, 전국 사범학교에서 각각 3명씩 차출(差出)하라는 문교부(文敎部) 방침이 시달(示達)된 것이다. 학교 측에서는 누구를 보내느냐는 문제를 논의하던 중 성적(成績)순으로 결정해서 나에게 통고(通告)를 한 것이다. 그 동안 학생회(學生會)와 호국단(護國團) 간부들 측은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여 마땅히 자기들을 선발(選拔)해달라고 강력하게 건의(建議)했다는 후문(後聞)이었다. 나는 그러한 경위(經緯)를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학교 방
침이니까 순응(順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등 최황휴(崔滉休)와 2등 서두수(徐斗洙) 그리
고 3등인 내가 뽑혀 서울로 오게 되었다.
초라한 짐을 꾸려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모님께 자초지종(自初至終) 이야기하였더니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도(濟州道)로 보내고,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낸다고 했느니라.”
고 하시며 잘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부랴부랴 양복점(洋服店)에 가서 곤색 세루(serge 프) 양복을 한 벌 맞추고, 종근 삼촌이 구두 한 켤레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지우(知友)에게 연락해서 임시 거처(居處)를 마련했다. 처음으로 정장(正裝)을 했다. 흰 와이셔어츠(white shirt)에, 돛단배와 갈매기가 그려진 빨간 넥타이(necktie)를 매고, 곤색 세루 양복을 입었다. 처음 기른 머리에 끈적끈적한 포마아드(pomade)를 바르고, 간단한 양(羊)가죽 손가방을 든 채 집을 나섰다. 대견해하는 부모님은 물론, 좋아하는 누님과 중학생인 동생 상수와 그리고 이제 어린 건수 동생을 뒤돌아보며 고향을 떠났다. 만 19세 나이로.
광주에서 은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많은 학우들의 선망(羨望)을 받으며 황휴와 같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힘차게 달리는 철마(鐵馬)의 쇠바퀴 소리와 내 심장의 고동(鼓動) 소리가 이중주(二重奏)를 연주(演奏)하고 있었다. 차창 밖 어둠 속에서 별들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날이 새자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아직도 아침 공기는 스산하게 옷소매 속으로 스며들었다. 약도(略圖)를 보고 먼저 황휴의 친척 형에게 찾아갔다. 영등포구 당산동(堂山洞) 판잣집 같은 곳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간단한 아침밥을 얻어먹고, 그 형의 안내로 종로구 가회동(嘉會洞)을 찾아갔다. 가회동은 당산동과 전혀 다른 이방지대(異邦地帶)였다. 멋진 전통(傳統) 한옥 기와집들이 즐비(櫛比)하게 늘어서 있었다. 적힌 주소를 찾아간 집은 당시 종로경찰서 경위(警衛)인 K씨 댁인 것이다. 아버지의 친구의 아우인 것이다. 어찌나 좋은 집인지 궁전(宮殿) 같았으며, 갖가지 음식도 맛있고, 식모(食母)와 침모(針母)가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주부(主婦)인 아주머니는 허약했으나 왕비(王妃) 같았다. 경기(京畿), 중앙(中央), 중동(中東)중학교에 다니는 동생, 조카, 처남들이 각각의 방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모두가 표준말을 쓰며 명랑하였고, 입시 공부, 대학 진학, 해외 유학에 관한 것이 화제(話題)의 전부이었다. 그야말로 별천지(別天地)에 온 것이다. 그리고 내 딴으로는 정장(正裝)으로 최고 멋을 부리노라고 했는데 내가 봐도 촌티가 났다. 온 식구들이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나 오히려 나에게는 짐이 되고, 마치 바늘방석 위에 앉은 듯 했다.
이 날은 식목일(植木日)이 되어 공휴일이었다. 이튿날, 날이 새자마자 아저씨의 명령에 따라 온 식구들이 청소를 했는데, 마치 군대(軍隊) 같았다. 자유로운 가운데도 기율(紀律)이 엄격해서 일을 잘 했다. 나도 물론 함께 청소를 했다. 축대 위, 담장마다 개나리들이 한창이었다. 아침을 들고 시내로 나왔다. 아직도 복구(復舊)되지 않은 전화(戰禍)의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지만, 과연 서울은 서울이었다. 사람의 물결이요 자동차의 홍수(洪水)요 고층 건물의 숲 그대로였다. 전차(電車)를 타고 서울시청으로 찾아갔는데, 교육국은 별관(別館)이었다. 여기에서 발령장(發令狀)을 받았는데 나는 영등포구의 우신(又新國民學校)이었고, 황휴는 용산구의 삼광(三光國民學校), 두수는 동대문구의 용두(龍頭國民學校)로 각각 났다. 일제(日帝)때 우신교는 조선인들, 영등포교는 일본인들의 학교로서, 영등포의 쌍벽(雙璧)을 이룬 유서(由緖)깊은 학교라 했다. 又新! 또 새롭다. ‘日日新 又日新’에서 나온 이름이다. 사범학교 현관 앞에 서있는 ‘날로새로워라’의 비문(碑文)이 눈앞에 오우버랩(over-lap) 되어 떠올랐다. 희망을 안고 찾아간 서울우신국민학교!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신길동(新吉洞)에 자리 잡은 이 학교 주
변(周邊)은 논밭과 야산과 판잣집들이 즐비했다. 그나마 교사(校舍)는 6.25 때의 폭격(爆擊)으로 잔해(殘骸) 그대로였으며, 운동장 가에는 콘센트(concentration camp) 병원(病院)이 자리 잡고 있었다. 6.25전쟁 때 의료부대로 참전(參戰)한 이태리병원인 것이다. 그리고 공동묘지(共同墓地)를 한참 지나가서 대방동(大方洞)에 분교(分校)가 있었는데, 모두가 허허 벌판에 세워진 천막(天幕) 교실이었다. 천막 사이사이에서 꾀죄죄한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으며, 시작종이 나면 천막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땅바닥에는 가마니가 깔려 있고, 이고 다니는 책상만 몇 개 눈에 뜨일 뿐 아이들은 맨바닥에 마치 콩나물시루 같이 빽빽이 앉아 공부를 하였다. 한 학급 재적수(在籍數)가 100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비 오는 날이면 천막에서 줄줄 흘러내린 빗물을 양동이로 받고 있었다.
‘이것이 학교란 말인가?’
‘이것이 수도 서울의 학교란 말인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연방 혀를 차면서 광주를 생각했다. 師範附屬,瑞石,壽昌,中央,鷄林,鶴岡,大成...어느 국민학교가 이렇다는 말인가? 내가 서울에 오지 않았다면 전남 제일의 서석교(瑞石校)로 발령을 받았을 텐데, 친구들의 선망(羨望)을 받으며 희망을 안고 왔다는 학교가 고작 이 꼴이라니...
‘빛 좋은 개살구다!’
첫 부임(赴任) 인사를 했다. 서울사범 출신이 열 명쯤, 각 지방 사범 출신이 여섯 명이나 되는 신임(新任) 교사들로 북적대어 마치 시골 장터 같았다. 교무실(敎務室)이라는 게 앉을 데도 설 데도 마땅치 않았다. 한용택(韓龍澤)교장은 학급 담임 발표를 했는데 나에게는 학급을 주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가장 막내였기 때문이리라. 교실 부족으로 유보(留保) 상태였다. 몇 달이 지나자 분반(分班)하여 4학년 7반 여자 반을 담임하였다. 여자 반이 셋인데 얼른 보아도 가장 후진(後進) 반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른바 알맹이는 다 빼돌리고 껍데기만 넘겨주었다. 결손(缺損) 가정, 빈곤(貧困)한 아동, 열등생(劣等生)...이런 아이들만 고스란히 모아서 90명 정도를 넘겨준 것이다. 이 일을 주도(主導)한 것은 당시 학년주임인 이종순선생인데, 지나친 편애(偏愛)가 몹시 언짢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보다 더 괴로운 것은 사친회비(師親會費)였다. 시(市)에서 주는 봉급(俸給) 가지고는 입에 풀칠도 못할 정도고, 교사들의 보수는 거의 아동들의 사친회비에 의존(依存)했는데, 사친회비가 걷히지 않은 것이다. 징수(徵收)하지 못한 사친회비만큼 보수에서 공제(控除)하는 것이다. 월급 봉투에는 노상 빨간 숫자만 씌어있어서,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강력한 독촉(督促)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는 가정 방문(訪問)이 허용되었으나 가정 방문을 가보면, 독촉은커녕 오히려 보태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다른 교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책가방을 빼앗아놓고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보통이었다. 나는 차마 그 일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 나는 무능력자 취급(取扱)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입시(入試) 위주의 교육 풍토(風土)도 큰 갈등(葛藤) 요소였다. 6학년 교실은 밀폐(密閉)된 지옥(地獄)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크레믈린궁(Kremlin宮 러)이라고 했으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밖에서는 알 수 없고, 불쑥 문을 열어볼 수조차 없다. 웃음이라고는 한 구석에도 찾을 수 없는 근엄(謹嚴)(?)한 담임은 노상 책상 앞에 앉아서 감시(監視)만 할 뿐, 학습은 아동 스스로 하는 자습(自習)이 대부분이다. 말이 학습이지 교과서 심지어는 전과지도서(全科指導書)까지 암기(暗記)하는 것이며, 두 권의 교과서를 주문(注文)해서 한 권은 중요한 단어(單語)마다 까맣게 색칠해놓고, 그것을 읽히는 것이 학습지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 책 악보(樂譜)까지 외우는데, 음표를 숫자로 표기(表記)해서 가락을
붙여 노래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이렇게 해서 암기(暗記)를 잘 하면 성적이 좋아, 명문학교에 많이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사들은 이렇게 해서 일류(一流)학교에 많이 입학시키면 가장 유능(有能)한 교사가 되어 6학년만 전담(專擔)하게 되고, 고액(高額) 과외(課外) 지도로 돈을 모을 수 있으니, 온통 인성(人性)교육이니 정서(情緖)교육이니 전인(全人)교육이니 하는 말조차 듣기 힘들었다. 50년대 재학 시절에 배웠던 소위 Jhon Dewey (죤 듀이)의 진보주의(進步主義)에 입각한 소위 ‘새교육’은 잠꼬대였다. 이 암담(暗澹)한 풍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야기와 웃음, 노래와 춤이 있는 교육을 하다보면, 다달이 있는 일제고사(一齊考査)에서 항상 꼴찌 학급(學級), 무능(無能) 교사로 낙인(烙印)찍혔다.
아! 내가 왜 이런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가? 이 암담(暗澹)한 감옥에서 탈옥(脫獄)하는 길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