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그들은 30대 후반의 중년(中年)이며, 6학년만 담임하는 중견(中堅) 교사들이었다. 그 파벌(派閥)들의 세력이 막강(莫强)해서 교내 인사 문제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지방에서 올라온 신졸(新卒) 후배들을 위한 환영회(歡迎會)를 갖겠다고 해서 영등포(永登浦)로 나갔다. 술상이 차려지고 주거니 받거니 제법 흥겨운 시간이 흘렀다. 선배들의 후의(厚意)에 감사한 동료들은 분위기(雰圍氣)에 잘 적응하고, 발갛게 취한 얼굴로 후배로서의 선배님에 대한 충성(?)을 고분고분 서약(誓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나였다. 권하는 술잔을 받나, 주는 담배를 피우나......썰렁해진 분위기를 급전(急傳)시키기 위한 기습(奇襲) 명령이 떨어지자, 팔을 붙잡고 입을 벌린 채 술병을 따라 부었다.
“콜록 콜록. 푸우...”
재채기와 함께 술이 풍겨져 나오고, 숨결이 가빠졌다. 나는 술이 체질에 맞지 않고, 선친(先親) 때부터 마시지 못한 집안이라 해도 막무가내(莫無可奈)였다. 선배들의 후의를 무시한 이 역신(逆臣)을 가만 둘 수가 없었으리라. 술시중을 든 접대부(接待婦)와 안타깝게 바라본 동료들도 한 모금만이라도 마시고는 잔을 돌리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몸에 배지 않아 끝끝내 못하고 말았다. 어서 술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밤이 깊었다. 술집을 나온 나는 이 고역(苦役)으로부터 빨리 해방(解放)되고 싶었다.
“야, 이 촌놈아, 객고(客苦)를 풀어 주겠다는데 왜 건방지게 굴어?”
혀가 꼬부라진 그들은 이제 욕설까지 퍼부었다. 반 강제로 끌려간 곳은 영등포역전(驛前) 어느 골목이었다. 주위 환경이 이상야릇했다. 화장(化粧)을 짙게 한 여자들과 어깨가 딱 벌어진 남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오더니 손님들에게 추파(秋波)를 던졌다. 육감(肉感)적으로 사창가(私娼街)라는 예감(豫感)이 들어, 재빨리 빠져 나와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휘파람골목’이라고 했다. 학교 숙직실(宿直室)로 돌아와서 잠을 청하는데 얼른 잠이 들지 않았다. 가회(嘉會)동에서 며칠 묵다가 숙소를 결정할 때까지 우선 학교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교문 앞 음식점에서 매식(買食)을 하고 있었던 때이다.
잠은 들지 않고 불쾌(不快)하고 분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삼금주의(三禁主義)라는 내 좌우명이 정면(正面)으로 도전(挑戰) 받은 첫 사례(事例)인데, 왜 싫다는 일을 그토록 강요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그들을 기피(忌避)했다. 평소에 존경하지도
않았지만 참 천박(淺薄)하고 저속(低俗)한 부류(部類)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유명한 교육자요 중견(中堅) 교사인지 환멸(幻滅)을 느꼈다.
며칠 후, 외출을 하고 교문에 들어서는데 웬 순경(巡警) 둘이서 나를 가로막더니 조사(調査)할 것이 있으니 파출소(派出所)로 가자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해도 무조건(無條件) 가자고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따라갔다. 몇몇 순경들이 앉아서 유숙계(留宿屆)를 냈느냐는 것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거주지(居住地)를 이동(移動)했으면 현 거주지 파출소에 유숙계를 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빨갱이인지 범죄자인지 알 수 없는 위법행위(違法行爲)라는 것이다. 나는 바로 근처에 있는 학교 교사요, 나와 같이 지방에서 올라온 교사가 얼마나 많은데 왜 나만 조사하느냐고 항변(抗辯)했지만, 그들은 위협적인 자세로 나를 노려보았다.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던 터라, 함부로 구속(拘束)하는 것이 오히려 위법(違法)이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건방지다며 때릴 듯한 표정이었다. 몇 시간 만에 풀려 나왔는데, 어둠 속이었지만 저쪽 골목에서 순경들과 신호(信號)를 주고받는 이ㅇㅇ선생을 발견하였다. 나는 모든 경위(經緯)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이 촌놈을 좀 골려주라는 그의 부탁이었을 것이다. 객고를 풀어 주겠노라는 선배를 배신(背信)한 이 무례(無禮)한 놈을 그렇게 복수(復讐)하였던 것이다. 그 후 그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쳤으며, 그 모습을 먼발치로 보기만 해도 구토증(嘔吐症)이 났다.
학교 숙직실에서 숙박하고 보니 숙직을 도맡아서 했다. 그 선배들은 나에게 대직(代直)을 부탁하고, 그들은 과외지도로 돈을 벌고 있었다. 한밤중에도 가끔 순시(巡視)를 해야 하는데, 운동장 쪽으로 가는 것은 참으로 으스스했다. 이태리병원에서 죽어 나온 시체(屍體)가 매일같이 시체실에 안치(安置)되어 있었는데, 푸르스름한 형광등 아래 하얀 홑이불을 둘러쓴 시체가 2층에서 내려다 보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면 정말 몸이 오싹거렸다.
그러나 그보다도 난처(難處)한 것은 도난이었다. 학교에 도난(盜難) 당할만한 귀중품이 있어서가 아니라, 좀도둑은 닥치는 대로 훔쳐갔다. 숙직을 전담하다보니 도난당한 물건을 변상(辨償)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하루는 쌀가마니를 도난당하였다. 쌀로 봉급을 주던 때가 있었는데, 미쳐 가져가지 않은 쌀은 창고에 쌓아두었더니, 창고 자물쇠를 부수고 이 쌀가마니 몇 개를 가져간 것이다. 아침에 먼저 일어난 청부(廳夫) 김씨 아저씨가 떨리는 손으로 알려주어서 황급(遑急)히 가보았다. 사실이었다. 동료들의 봉급인데 얼마나 난처한 일인가? 물론 변상(辨償)했지만 억울하고 분했다. 도대체 어디로 끌고 갔을까? 지고 갔을까? 하도 궁금해서 추적(追跡)을 해보았다. 잘 살펴보니까 쌀알이 몇 개씩 떨어져 있었다. 그 쌀을 따라서 가보았더니 아뿔싸! 바로 청부 김씨네 집에 이른 것이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과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김씨의 소행(所行)임을 직감(直感)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증거(證據)는 그것뿐이고, 또 문제를 제기(提起)한들 더욱 복잡(複雜)하고 골치 아플 것 같아서 묵과(黙過)하고 말았지만, 두고두고 그 배신감(背信感)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후 그는 내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외면했다. 개더러 제사상을 지키라는 격이지.
어느 날은 구두를 잃어버렸다. 학교 신장에 넣어놓은 것을 학부모로 가장(假裝)하고 학교에 온 도둑이 훔쳐간 것이다. 구두가 귀해서 잘 도난당한 품목(品目) 중의 하나였다. 실내화를 신고 퇴근(退勤)했는데, 길가에서 헌 구두를 팔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내 구두도 거기에 있지 않는가? 그 당시에는 그런 구두가 모두 장물(臟物)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 것이라는 증거를 댈 수 없으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 보고만 지나칠 수밖에.
‘구두야, 넌 알겠지?’
어느 날이었다. 고향 사람이 학교에 찾아왔다. 아버지와 함께 정치운동을 했던 동지라면서,
아버지를 아주 존경(尊敬)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 집 사정을 샅샅이 알고 있었으며, 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 소매치기를 당하고 하향(下鄕)하려는데 차비가 없어 차비를 빌려주면 고향에 내려가서 아버지께 갚겠노라고 했다. 점심을 사드리고, 차비에다가 용돈까지 더 얹혀서 드렸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 전혀 모르는 사기꾼이었다.
전ㅇㅇ선생이 돈을 꾸어 달라 했다. 한 달 후에 갚겠다는 그가 몇 달이 가도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쪼들리면 그럴 것인가 생각하고 오히려 측은(惻隱)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 1년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어 그 때는 슬쩍 돈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러나 그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그 때 금방 갚았다지 않는가? 어이가 없어 잘 생각해 보라 해도 자기는 틀림없이 갚았노라고 시치미를 딱 떼었다.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깨끗이 떼이고 말았다.
그저 당하고 또 당하고 또 또 당하고....
숙직실에서 더 있다가는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동료 박종휘(朴鐘徽)선생과 함께 하숙을 하기로 하였다. 학교 근처 복환이네 집(박선생의 제자)이다. 충청북도 사람들인데, 참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방도 비좁고, 변소는 건너편 밭두렁에 가건물(假建物)로 얼기설기 세워져 있었으며, 농촌 변소와 같이 큰 독을 땅에 묻고 판자 두 개 걸쳐놓은 것이다. 사범대학에 다니는 朴선생의 친구 C가 놀러왔는데 그만 이 변소에 빠진 것이다. 얼마나 부끄럽고, 얼마나 민망(憫惘)했겠는가? 그가 후에 서울대 사범대 교수가 되었으니.
아주머니가 교육열은 있어서 담임에게 하노라고 하였으나 수다스럽고, 음식 솜씨가 정갈하지 못하였다. 캐배추(cabage)를 숭숭 썰어서 소금에 절였다가 고춧가루를 뿌려놓는 게 김치였는데, 구린내 같은 냄새가 나곤 해서 속이 메스꺼웠다. 여름 방학이 되어 朴선생이 꼬막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해먹을지 몰라서 된장국에 넣어 끓여 가지고 왔다. 물어나 보지.
학부모가 되어서 하숙비(下宿費)는 싼 편이었으나 도저히 음식이 맞지 않아서 나오기로 했다. 그리하여 가마골 용주네 집에 셋방을 얻어 자취(自炊)를 나왔다. 바로 학교 근처인데, 옛날 강(姜)씨 박(朴)씨의 집성촌(集成村)이라 강박골이 맞다고도 했으며, 기와를 굽는 가마가 당시에도 있어서 가마골이 맞다고도 했다. 봉급(俸給)으로 나온 동남아산 (東南亞産) 쌀이 쌓여서 항상 식량은 풍부했으며, 반찬은 꽁치 통조림과 두부를 사다가 찌개를 자주 끓여먹곤 했다.
젊은 교사들이 많아서 잘 어울려 다녔다. 학교에서는 방과 후에 탁구(卓球)들을 많이 쳤는데 나는 오르간(organ)을 많이 쳤다. 세계 명곡집(名曲集)에 있는 곡들이 참 좋았다. 여러 나라의 민요(民謠)들을 좋아했는데, 아일렌드 민요 ‘Lodon Derry Ai(아!목동아)’ 와 ‘오,나의 태양’ 그리고 여러가지 세레나데(serenade)를 특히 좋아했다. 영등포에 있는 영보(永寶)극장과 남도(南都)극장에 가서 영화를 자주 보았다. 그 중에서 상수 동생과 함께 용산 성남극장에서 본 영화 빅터 플레밍 감독,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 주연(主演)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참으로 감명 깊었다. 그 후 책으로도 읽었는데, 작가 마가릿 미첼과 같이 나도 인생 일대에 꼭 그러한 작품 하나쯤 쓰고 싶었다. 끝나면 다방에서 차를 마시거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는데, 이 때 동료들은 나에게 술 담배를 권하지 않아서 좋았다.
연애(戀愛)를 한 친구, 사창가(私娼街)를 드나들다가 임질(淋疾)에 걸려, 비뇨기과(泌尿器科)를 출입하는 동료, 음모(陰毛)에 기생충(寄生蟲)이 옮겨 붙어 가려워 긁어대는 동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이것이 새 환경에의 적응(適應)이요, 인생을 배우는 초등 학습이며, 처세술(處世術)을 익히는 연습(練習)이라고 했다.
객고(客苦)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된 이후, 융통성(融通性) 없는 나 자신의 고집(固執)을 꾸짖
으며, 나도 삼실주의(三實主義)의 하나인 현실(現實)과 타협(妥協)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답시고 꽤 노력을 했다. 천사(天使)처럼 살 수도 없을 바엔 나 혼자 고고(孤高)한 척 하지 않기 위해 그런 동료들과 어울리기로 했다. 삼금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당구(撞球)도 쳐보고, 바둑도 두어보고, 사교댄스 스탭(step)도 밟아보고....나이트클럽(night club)에도 가보았다. 모두들 풍요(豊饒)로운 삶을 구가(謳歌)하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열풍(熱風)으로 건조(乾燥)한 이 사막(砂漠)에서, 그런 것 모두가 나에게는 야자수(椰子樹) 그늘이 되지 못하였다. 이런 황량(荒凉)한 풍토(風土)가 내가 해갈(解渴)할 수 있는 오아시스(oasis)는 결코 아니었다.
이러다 보니까 어느덧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다. 새 바지도 사서 입고, 중고품(中古品) 시계도 차며, 처음 유행(流行)한 나일론(nylon) 남방셔츠도 걸치고. 그리고 누님에게는 새 손목시계와 새로 나온 비닐(vinyl)보자기 선물도 샀다. 이것이 첫 금의환향(錦衣還鄕)이다. 아니 금의야행(錦衣夜行)이 어울리는 말이다. 서울 간 아들이 돌아온다니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李夢龍)이나 돌아온 것처럼 생각했으나, 고향에 돌아온 나는 뜨거운 모랫바람에 시달린 거무튀튀하고 까칠까칠한 얼굴 그대로였다.
돈을 벌었나, 삶을 즐겼나...온실(溫室) 안에서 피었던 아름다운 꽃은 온실밖에 나오자마자 찬바람과 세찬 빗줄기에 무참(無慘)하게 꺾이고 시들었다. 직업전선(職業戰線)에 나온지 만 1년이 되었는데 남은 것이라고는 허탈(虛脫)뿐이었다. 졸업식장에서 송사(送辭)와 축사(祝辭)를 읽을 때, 폭풍(暴風)이 부는 광야로 나가면 그 길은 형극(荊棘)의 길이며, 격랑(激浪)이 이는 바다로 나가면 그 길은 난항(難航)이라 하더니, 나는 사막(沙漠)으로 나온 대상(隊商)이 아닌 바로 고독(孤獨)한 나그네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