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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의 백합화-누님

청년시절

by 최연수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

고요히 머리 숙여 홀로 피었네.

인적이 끊어진 깊은 산속에

고요히 머리 숙여 홀로 피었네.

어여뻐라 순결한 흰 백합화야

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이 노래를 부르노라면 누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누님은 장미꽃을 좋아했다. 정열적(情熱的)인 빛깔과 가시 속에서 피어난 그 의지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하지만 누님의 이미지(image)는 한 송이 흰 백합화(百合花)가 알맞았다. 하얀 피부와 함께 그 마음이 하얗고 깨끗했다. 그러나 미간(眉間)의 흉터는 옥에 티였고, 평생 가슴앓이를 해온 마음속의 가시였을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물동이를 이고 얼음판에 미끄러져 다친 데가 그만 흉터가 된 것이다.

두 살 터울이라 자랄 때는 경쟁관계가 되어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고향 집은 불타고, 하숙집에서 홀대(忽待)를 받고 속을 썩이고 있을 때, 누님이 묵고 있는 광주여중 기숙사(寄宿舍)를 찾아가면, 어머니와도 같이 포근하게 감싸주곤 했다. 둘이서 굶기를 밥 먹 듯 했던 자취 시절, 누님은 한 숟갈이라도 나에게 밥을 더 주었다. 가정 형편에 따라 중학교만을 졸업한 채 낙향(落鄕)해 버린 후, 양재학원(洋裁學院)을 다니는 등 진로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하였다.

1956년 2월, 혼사(婚事)로 인해서 결근을 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집안이 몹시 분주하였다. 누

님은 해당리에 사는 김영진(金永珍)이라는 총각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불과 23 살 나이지만 그 당시로는 적령(適齡)이었다. 아버지 친구(金容年)의 중매(仲媒)로 만났는데, 오랜 기간 교제한 것은 아니고, 전남대학 화학과를 나온 엘리트(elite) 청년으로서 분에 넘치는 배우자(配偶者)로 모두 만족하고 있었다. 좋은 사람과 결혼한다니 나도 기쁠 수밖에 없었다. 취직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모은 것도 없지만, 그 동안 모은 것을 몽땅 털어서 혼사(婚事) 비용에 보태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 이전에 누님을 짝사랑한 사람들이 두세 사람 있었다.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이혼한 경찰관(警察官)과, 노총각인 전남일보 자유기고가(自由寄稿家)였다. 그들은 입술이 탈 정도로 달궈진 열정(熱情)으로 구혼(求婚)했으나, 어려운 우리 가정 형편과, 누님의 흠을 얕잡아 덤비는 듯한 인상이 불쾌(不快)하여 내가 적극 반대하였다.

전날, 음식을 장만하랴 집 안에 식장과 신방(新房)을 꾸미랴 몹시 바쁜데, 난데없이 신랑이 행방불명(行方不明)되었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 때마침 산야(山野)에 눈이 쌓였는데, 온 집안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주위를 샅샅이 뒤졌으나 헛수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런 낭패(狼狽)가.....혹시나 하고 바깥에 귀를 기울였으나, 당일에도 해만 중천(中天)에 결렸을 뿐 신랑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부모 없이 결혼한 서러움에 복받쳐 눈 쌓인 산야(山野)를 배회(徘徊)하다가 길을 잃었거나, 몽유병(夢遊病)에 걸려 실족(失足)하여 어느 골짜기에서 신음(呻吟)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결혼할 뜻이 없어 파혼(破婚)을 위해 어느 친구 집으로 잠적(潛跡)했을 거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못한 어떤 고민으로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었다. 이 미스터리(mystery)로 갖가지 추측(推測)들만 무성한 채 당사자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고, 우리 집안은 마치 초상집과 같았다.

바위 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극(極)에 달했을 누님의 착잡(錯雜)한 마음을 어떻게 달랠 수가 없어, 나는 이흥렬 작곡 ‘바위고개’를 자꾸 불렀다. 그리워 눈물을 흘릴 정도로 연모(戀慕)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토록 연약(軟弱)하고 무력(無力)한 사람이라면 단념(斷念)하여 파혼하려고 했었는지, 그 깊은 속마음은 헤아릴 수 없었다. 파혼해야 한다는 주장과 더 기다려보자는 의견이 분분(紛紛)한 가운데, 나는 곧바로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돌이켜 생각하기도 싫은 이 사건을 잊으려 할 무렵, 철이 바뀌어 봄이 되면서 결혼식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 오직 하나인 누님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지난 그 미스터리가 몹시 궁금했지만, 본인의 입이 열리지 않은 채 지금까지도 그 미궁(迷宮)은 베일(veil)에 가려 있다.

일단 결혼했으니 행복하기만을 기원했는데, 그 후에 들려온 소식은 더욱 안타깝기만 했다. 남편이 대학을 나왔어도 직장은 없는 백수(白手)로서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농사 농(農) 자도 모르는 여인이 힘든 농사를 짓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복잡한 가정환경은 거의 질식(窒息)할 정도였다. 홀로 된 시어머니가 서모(庶母)인데다가, 탈영(脫營)하여 은신해 있는 시동생의 낭비벽(浪費癖)과 주벽(酒癖)과 특히 여성 편력(偏歷)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호적상으로는 숙부의 양자(養子)로 입적(入籍)되어 있으나, 숙부가 사업으로 실패하는 바람에 생가에서 생활하면서, 용돈 문제로 어머니와 형수와 다툼이 잦았다. 물론 시동생은 그 나름대로 형수(兄嫂)가 고분고분하지 않고 고집이 세다고 불평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신박약자로 문 밖 출입도 못한 채 밥만 얻어먹는 숙부(叔父) 뻘 되는 식객(食客)을 수발하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서모(庶母)라도 그런대로 며느리에게 잘 해준 편이지만, 남편은 마음만 착할 뿐 무능무력하고, 시동생은 망나니 노릇을 해서 살기 힘들다고 이따금 친정에 와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하소연을 했다. 게다가 친정과 합자(合資)해서 드라이크리닝 세탁소를 개업했으나, 종업원의 실화로 소송에 말려들면서 일부 전답(田畓)을 손해배상(損害賠償)으로 빼앗기기도 했으니, 참으로 견디기 힘든 환경이었다. 세탁소를 경영하면서도 장모와 사위 사이가 매끄럽지 못한 채 마찰(摩擦)이 있었다고 했다.

웬만하면 참고 살아야 한다며 친정 부모들은 달래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차라리 그 때 파혼하고 그 경찰관과 결혼했더라면 좋을 뻔 했다는 후회도 하였다. ‘차라리 일찍 늙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누님의 결혼 생활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 후 매형(妹兄)은 장흥 용산 시골 국민학교 교사로 취직되어 분가(分家)를 했으나, 그 때는 남편의 바람 때문에 또 곤욕(困辱)을 겪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한지 5,6 년이 되었는데 임신(姙娠)을 하지 못해서, 눈에 보이지 않은 소박(疏薄)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1년 매형이 입대를 했을 때, 누님은 서울 친정(親庭)으로 올라 와 기거(寄居)를 했다. 이 기회에 이혼해서 홀로 살았으면 하여, 직장도 알아보고 학원도 알아보았다. 면회를 오지 않느냐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망설이며 무척 고민을 했다.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매형이 제대하는 바람에 누님은 마음을 돌이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1962년 5월 23일 고흥 도양동국민학교로 복직했으며, 사귀던 처녀와도 결별(訣別)하여 이제 안정을 되찾은 듯 했다. 참 다행이었다.

결혼한지 만 6년이 된 1962년 12월 22일, 임신했다는 낭보(朗報)가 전해 왔다. 예수를 믿고 기도하고 있었기에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이듬해 해산(解産) 달이 가까웠는데, 6월 23일 “태사중수술위독속래” 라는 자형의 전보를 받았다. 어머니와 둘이서 전라선에 몸을 실었다. 벌교에서 버스를 타고 고흥으로 가는 길은 마치 수로(水路)였다. 5.16 군사 쿠데타의 후유증(後遺症)이 가시지 않고, 경제 위기로 민심이 흉흉(洶洶)한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태풍(세리호), 수재(水災)까지 겹쳐, 세상이 몹시 혼란한 때였다. 그런데, 누님은 고흥 제중의원에서 제왕절개(帝王切開)로 쌍둥이를 낳고 입원 중이었다. 매형과 함께 냇가로 나가 태를 띄워 보내는 기쁨과 감사를 어찌 표현할 수 있었으랴. 이 기쁨을 안고, 일주일로 다가온 고등고시 시험을 위해서 나는 곧 상경하였다. 곧 친구들에게 2000원을 꾸어서 입원비에 보태라고 보냈다. 그런데 28일 퇴원해서 귀가했다면서 반송되어 왔다. 20일간 입원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는데....7월 6일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지난 27일 오후 5시 하늘나라로 갔다는 짤막한 비보(悲報)였다. 그러나 누님 최맹심(崔孟心)은 1933년(癸酉) 음력 4월 6일(양 4월 30일)생이니까 만 30년의 짧은 생애에 종지부(終止符)를 찍은 것이다. 믿고 하늘나라에 갔다고는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 이름까지 모독(冒瀆)하면서 교회도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보다도 더한 충격이었다.

7월 12일 가당(加糖)비락이 변비(便秘)가 되므로, 일제 모리나가(森永) dry milk를 사보내라는 편지가 왔다. 우리도 밥을 굶는 처지였지만, 효자동까지 가서 사 보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외동딸을 가슴에 묻고, 외손자들을 위해 그 곳에 머물렀다. 슬픔과 괴로움을 이기기 위해 교회에 부지런히 나가면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 이야기에 흠뻑 취하여, 그들과 같이 싸우지 말고, 야곱과 같이 복 받는 사람이 될 것을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나 두 아이를 기르기가 너무 힘들어, 형 준업(承甲)은 유모(乳母)를 구해 고향으로 보내고, 동생 준영(承珉)이만을 기르면서, 사위를 재혼시키기 위해 백방(百方)으로 노력을 하였다. 1964년 9월 어머니는 1년 4개월 만에 준영이를 업은 채 더부살이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복직(復職)을 하였으므로 살림 형편은 나아졌으나, 아직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누님과 생명을 바꾼 생질(甥姪)을 위해서,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인 나는 최선을 다 해서 양육했다. 준영은 큰 탈 없이 귀엽게 잘 자랐으며, 말도 배우기 시작했다. 드디어 매형은 그 해 10월 24일, 어머니가 중매한 그 미용사(美容師) 처녀와 재혼(再婚)했다. 이 소식을 접한 어머니는 안도(安堵)하면서도, 외손자를 안고 “니 엄마를 보고잪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1965년 6월 6일 입영하라는 징집(徵集) 영장을 받았다. 세 번째이다. 만일 입영을 하게 되면 가족들은 다시 배가 고파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아이를 기를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준영을 부모에게로 보내기로 했다. 때 마침 하향(下鄕)하는 외사촌 동생 편에, 편지를 써서 말도 채 못하는 준영을 업혀 보내었다. 어머니와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만 1년 11개월, 서울에 온지 8개월만인 5월 4일이었다. 그로부터 9일 만인 13일 매형(妹兄)으로부터 답장이 오기를 몹시 섭섭했노라고 했다. 물론 준영의 새엄마도 딸을 낳았다니 힘들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형 준업의 소식을 들었다. 영양실조(營養失調)로 거의 죽어간다는 것이다. 한편 1967년 12월 19일 매형(妹兄)은 쌍둥이를 기를 수 없으니 한 애만 양육(養育)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마음 내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68년 초 데려왔는데, 이란성(二卵性) 쌍둥이라 형제가 닮지 않았다. 아닌게아니라 머리는 마치 해골(骸骨) 같았고, 유치(乳齒)는 다 삭았으며, 걸으면 두 다리가 꼬이는 듯 했다. 유모에게서 젖을 먹고 자랐으니까 분유(粉乳) 먹고 자란 동생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산간 벽지(僻地)에서 일정한 직업도 없이 그 날 그날 살아가는 유모네 가족에게는, 양육비로 보낸 돈이 그만 생계비(生計費)로 쓰였을 테니, 아기를 챙길 여유가 없었으리라. 너무도 불쌍해서 심혈(心血)을 기울여 보살폈다. 이 무렵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는 노총각인 나의 생질이 아니라, 혹시 아들이 아니냐고 색안경(色眼鏡)을 쓰고 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맞선을 보고 있는 판에.....

그런데 1970년 6월 26일 사촌누이를 통해 전해온 이야기는 황당(荒唐)했다. 아이를 만약 보내면 엄마는 이혼하겠다 하고, 아빠는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너무 기가 막혀서 나는 가시 돋힌 편지를 냈다. 부모가 되었으면 자식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느냐? 자식은 미움을 받고 매를 맞더라도 부모 슬하(膝下)에서 자라야 정이 들지 않겠느냐? 나도 이제 결혼을 해야 하는데 무한정 조카를 양육할 수 없지 않느냐? 는 내용이었다. 학령기(學齡期)가 되어 입학을 해야 하는데, 너무 어리고 약해서 입학을 시키지 못하고 유예(猶豫)를 하였다. 그런데 1970년 12월 27일, 2,3년만 더 양육해달라는 편지가 다시 왔다. 하는 수 없이 학령(學齡)이 초과된 1971년 3월 5일, 내가 나가는 명수대(眀水臺)국민학교에 일단 입학을 시켰다(1-2 沈裕姬선생). 그리고 1학기가 다 끝나갈 무렵인 6월 3일 데려가야 하지 않느냐는 간곡한 편지를 다시 내었다. 그리하여 그 해 8월 21일, 서울에 온 부모에게 인계하여 광주 자기 집으로 내려 보내었다. 그 1년 후 여름방학 동안에는 쌍둥이들이 서울에 와서 놀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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