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그 당시 사범학교는 수업료를 국고(國庫)로 지원(支援)하고 있었기 때문에, 졸업 후 4년 동안은 의무적(義務的)으로 교직(敎職)에 근무(勤務)해야 했다. 그러므로 취직(就職)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큰 꿈을 키워보겠다는 남자들에게는 매력(魅力)없는 직종(職種)이었다. 그래서 사범학교에 다니면서도 대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더구나 우리가 졸업한 해에는 초급대학(初級大學)인 광주사범대학(師範大學)으로 승격(昇格)되었다. 많은 학우들이 이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법관이 되고자 마음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범대학은 국어과(國語科)와 수학과(數學科)만 개설(開設)되어 있는데 나의 진로(進路)와는 상관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법관(法官)이 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하였다. 아버지께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식을 통해서 이루어보자는 것이었고, 또 그 당시 법관은 권력(權力)과 명예(名譽)와 재물(財物) 등 모든 것을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이었다. 더구나 아버지의 지기(知己)의 아들이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옛날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것만큼 고을의 축제(祝祭)가 되어, 젊은이들에게 선망(羨望)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절에 들어가 공부하는 사람, 삭발(削髮)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생기자,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視線)을 끌었다.
감수성(感受性)이 예민한데다가, 소위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 한다고 파다하게 소문이 나있던 나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광주지방법원(地方法院) 장흥지원(支院)이 가까이 있어서, 아버지는 가끔 재판정(裁判廷) 방청(傍聽)도 시켰다. 논고(論告)하는 검사(檢事), 변론(辯論)하는 변호사(辯護士), 판결(判決)하는 판사(判事). 이 모든 사람이 하늘만큼 우러러 보였다.
‘나도 법관이 되자! 고등고시에 합격하자!’
주먹을 쥐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영예(榮譽)요, 부모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효도(孝道)요, 국가적으로는 충성(忠誠)이 아니겠는가? 이 길만이 적수공권(赤手空拳)이었던 과거에 대한 보상(補償)이요, 신분(身分)과 계층(階層)의 수직(垂直) 상승(上昇)이라는 미래에 관한 확실한 보장(保障)이요, 사회정의(社會正義)의 구현(具現)이라는 이상(理想)을 이룰 수 있는 첩경(捷徑)이 아니겠는가? 졸업 앨범(album) 사진을 찍는데 나는 광주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터에 내 꿈을 깊게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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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재학중(在學中)에 보통고시(普通考試)에 응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 보통고시는 4급 공무원으로서, 군수(郡守)나 경감(警監) 같은 대단한 벼슬자리 시험이었다. 국어,국사,수학,지리,작문,법제대의,경제대의가 시험과목인데, 법제대의와 경제대의는 생소(生疎)한 과목
이다. 張承斗 張暻根 공저 ‘法制大意’와 成昌煥 저 ‘經濟原論’ 헌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이
어서 李昌洙 저 ‘大韓民國憲法大意’와 康明玉 저 ‘行政法總論’을 사서 읽었다. 첫 인상은 법학은 흥미 있으나 범위가 너무 넓고, 경제학은 깊고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읽고 또 읽고...수업 시간에도 몰래 읽다가 선생님의 꾸중도 들었으며, ~척 한다고 급우(級友)들의 조소(嘲笑)도 받았다.
그러나 발을 뗀 이상 뒤돌아 설 수는 없었다. 학교 공부와 병행(竝行)하고 보니 시간이 부족하고, 허약(虛弱)한 신체에 영양(營養) 부족으로 쉬 피곤한 게 장애(障碍)요소였다. 선생님들과 학우들 몰래 1953년 제7회 보통고시(普通考試)에 응시했다. 2학년이었으니까 나 같은 빡빡 머리의 10대 학생들은 별로 없고, 거의 다 20,30대 심지어는 40대의 청장년들도 상당수였다. 독학(獨學)을 한 10년 연상의 명식(明植)아저씨(아버지의 고종사촌)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어 한편 자랑스러웠으나 솔직히 위축(萎縮)되는 느낌이 들었다. 결과는 낙방(落榜)이었다. 부담 없이 응시했으므로 큰 기대를 걸지 않아 상처는 없었다. 재학 중에 한 번 시도해보는 것이었으니까.
1954년 11월 29일에는 제2차 개헌(改憲)이 있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重任) 제한(制限)을 없애자는 내용인데, 재적 2/3이상이 되지 못했는데도 사사오입(四捨五入=반올림)이란 억지 논리로 결국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휴전으로 사회가 간신히 안정되어 가는데, 정국(政局)은 또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서서히 정치로부터 손을 떼며, 생계를 위해 소매를 걷어 올릴 무렵이었다. 아버지의 정치활동에 덴 나는 정치 문제로부터 초연(超然)하고자 했으나, 분통(憤痛)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러나 3학년 졸업반이 되었으니,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학교 공부에 충실히 해야 했다. 직업전선(職業戰線)에 나가야 하는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생(敎生)실습도 충실히 해야 하고... 그래도 고등고시를 향한 발걸음을 돌이킬 수 없어, ‘考試界’라는 월간지를 사보았다. 피 어린 수험기, 눈물겨운 합격기들은 청운(靑雲)의 뜻을 더욱 부풀게 하였고, 각종 고시 안내(案內)는 좋은 정보(情報)로서 계획을 세우는데 큰 참고가 되었으며, 강의는 유유(幽幽)한 학문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3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먼 친척 되는 노인 한 분이 집에 오셨는데 관상(觀相)을 볼 줄 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나더러 관상을 보라는 게 아닌가? 나는 한 말로 싫다고 했다. 점치는 것을 비롯해서 토정비결(土亭秘訣),관상, 손금을 보면서 운세(運勢)를 알아보고 장래 일을 예언(豫言)하는 따위의 비과학적 미신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시절 아버지께서는 어느 성명(姓名) 철학을 한다는 분의 권유에 따라, 우리들의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해서 개명(改名)을 해주셨다. 連洙인 나는 ‘正洙’로, 祥洙인 동생은 ‘玄洙’로. 그래서 집에서는 그렇게 불렀으며, 동네에서도 그렇게 불러준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고쳐주지 않아서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고 미신 같아서,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의도적(意圖的)으로 쓰지 않았다. 그런데 또 관상이라니...
그러나 아버지는 얼굴을 들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데, 고집부리지 말라고 해서 얼굴을 내밀고 앉았다. 노인은 샅샅이 살피더니 한자로 문장(文章)을 불러댔다. 아버지는 이를 받아썼지만 나는 일소(一笑)에 부쳤다. 그 가운데 귀를 솔깃하게 한 대목은 ‘조등관문(早登官門)’이었다. 약관(弱冠)에 관직(官職)에 오른다니 곧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청년 군수(郡守)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국민학교 교사도 공무원(公務員)이므로 그걸 염두(念頭)에 두고 한 말인가?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가장 귀에 거슬렸던 것은 ‘이십평생 수마중태(二十平生 瘦馬重汰)’ 였다. 20대는 파리하게 빼빼 마른 말이 무거운 짐을 졌다는 뜻
이다.
‘나의 강한 의지와 명석(明晳)한 두뇌로, 고시(高試)를 향해 힘차게 행진(行進)하고 있는데 이 무슨 불길(不吉)한 망언(妄言)이란 말이냐?’
‘불확실한 것은 운명이 지배하는 영역이요, 확실한 것은 무릇 인간의 재주가 관할하는 영역이다’는 라틴어 격언(格言)이 있다지만, 나는 숙명(宿命)이란 걸 믿지 않았다.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두뇌(頭腦)도 개발(開發)할 수 있고,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可能性)과 잠재력(潛在力)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에, 그 노인의 말을 묵살(黙殺)해버리고, 고등고시라는 험산준령(險山峻嶺)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그 당시 고등고시는 司法科, 行政科, 技術科 세 분야로 나뉘어 있었으며, 대학 1학년 이상 수료(修了)해야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그렇지 못하면 예비고시(豫備考試)에 합격해야만 하였다. 나는 이미 대학 진학을 포기했으므로 독학(獨學)을 하여 우선 예비고시를 보기로 비장(悲壯)한 각오를 했다. 그리고 사법.행정 양과(兩科)를 공략(攻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