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북상중인 태풍 메아리의 세력이 약해지고, 다행히 한반도를 비껴 지나갔다. 일주일만에 장맛비가 그치고 모처럼 반짝 햇빛이 났다. 설레는 마음으로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렸다. 북촌길에서 다시 삼청길로 나와, 회화나무와 은행나무 가로수 그늘 아래로 걸었다. 감사원 뒷길로 해서 2Km 남짓 걸었다. 일제 강점기인 ’40년 도시계획공원 제1호로 지정된 오래된 공원이라, 용의 비늘 같은 솔보굿의 묵은 소나무들을 비롯한 녹음방초로 공기가 상쾌하고 시원했다. 골짜기 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오랜만에 산새 소리도 들려와, 고향에 돌아와 포근한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했다.
도교에서는 신선이 사는 세 궁전을 태청(太淸)․상청(上淸)․옥청(玉淸)이라 하는데, 이 3위를 모셨던 삼청전(三淸殿)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물․수풀․사람의 마음이 맑은 것을 뜻한다고도 한다. 삼청공원 돌비가 서있는 입구에는 쉼터와 운동 시설이 드문드문 갖추어져 있어 사람들이 많았다. 완만한 계단으로 시작했다가 갑자기 가파른 나무계단으로 변했다. 그러나 탈무드를 비롯해서 명사들의 금언들이 난간에 붙어 있어, 가쁜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히도록 해주었다. 700 개가 넘는 계단이므로 체력이 딸린 여인들이 지레 엄살을 떨만도 하다. 그러나 막상 오르고 보니 삼삼오오 여인들이 더 많았다. 북악 성곽을 따라 걷다가 정오에 말바위에 도착했다. 시야가 약간 부옇게 흐렸으나, 남산이 앞에 서있고 멀리 관악산 봉우리도 보였다. 시내를 내려다보니 속이 탁 트이었다.
조선시대 문무백관들이 말을 타고 이곳에 올라와서 시도 읊고 녹음을 만끽했다 해서 말바위라 한다고. 또 한편 백악․북악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 끝에 있는 바위라 말(末)바위라 한다는 것. 시원한 바위에 누웠는데, 소나무 사이로 비추는 정오의 해가 황금덩어리 같이 찬란했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반기며 내 주위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닌다. 오래 머물고 싶었으나 되돌아 섰다. 내리막길은 한결 쉬웠다. 쉴 겸 8 개의 금언들을 모두 베끼면서 내려왔다.
실패를 걱정하지 말고, 부지런히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라. 노력한만큼 보상을 받을 것이다. -너민 V 필-
이러한 말로 힘을 얻어, 모두들 끈기있게 산을 오르는 듯 했다. 무척 무더웠으나 산책이 아닌 상쾌한 등산이었다. 아니 유산(遊山)이지.
5개월 후 가을의 정취를 즐기기 위해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누긋하게 걷기로 해, 지난번과 반대 방향으로 잡았다. 일청교를 지나니 두 폭의 시조비가 서있다. 정몽주의 어머니께서 일러준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와 아들 포은 정몽주의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이다. 창파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걱정하는 어머니와, 임 향한 일편단심 변치 않겠다는 아들의 충절이, 물과 수풀과 함께 잘 어울린다.
발맛사지길을 지나 걸으니 횡보 염상섭 좌상이 있다. 그 곁에 앉아보았다. 그는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최초의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를, 그리고 사실주의적 필치로 한국 근대문학의 한 맥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 분이지.
울창했던 나무들이 아낌없이 옷을 훌훌 벗어 던진 나목이구나. 육체적 집착과 쾌락에서 벗어나기 위한 종교인들의 수행에 동참하기 위함인가? 문득 ‘문화란 어느 가을 오후의 정적 속에서, 지평선 위에 펼쳐진 산줄기나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뭇가지 하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곧 산의 그리고 나뭇가지의 아우라(aura)를 숨 쉰다는 것이다’는 벤야민의 말이 생각났다. 그의 어려운 철학적 예술론을 이해하기는 너무 벅차다. 아무튼 문학이 필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가진 창조성과 영원한 가치 때문이다. 그런 문학의 위상을 믿는 많은 작가들이 고독을 견디며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슴을 비우고 머리를 식히며 그저 홀가분하게 걷기로 했는데, 이 나무 이 숲에서 어떤 아우라가 나오기에, 어느새 나도 돌팔이 문학가․철학가가 되어 있구나. 이 때 나로부터 나오는 영기(靈氣)의 반경은 얼마 만큼일까? 젊었을 적부터 숲길 산책은 일과처럼 되었다. 혼자 오롯이 고독한 숲길을 거닐면서, 산새와 들꽃을 벗 삼아 이야기하며 외로움을 달래었다. 가슴 속의 응어리를 노래로 풀며, 옹달샘처럼 솟아나는 상념들을 글로 쓰기도 하였다. 의례 깊은 사색에 빠지며 남들이 말하는 개똥철학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고독이 없으면 사색도 없다. 곧 깨달음은 고독의 사색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개똥철학이라 했지만 나에게는 당면한 ‘인생’의 문제였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종지부가 없이 이런 의문부로 빽빽한 밀림을 방황하다가, 마침내 유신록적 실존주의 출구에서 종교에 입문하면서 감탄부를 찍었다. 철학은 ‘사물’은 보다 넓고 깊게 생각해보고, ‘세계’를 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안목을 주었다. 괴테․헤겔․야스퍼스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을 때 사색하고 작품 구상을 했다는 하이델베르그의 길, 일본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사색을 즐기며 걸었던 교토의 철학의 길을 생각하면서 걸었다. 오늘도 오르막 길 울타리에는 10여 가지의 금언들이 걸려 있다. ‘겨울이 없다면 봄은 그렇게 즐겁지 않을 것이다’는 미국 여류 시인 앤 브레드스트리트의 시구가 마음에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