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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장대비가 그치고 다시 햇빛이 났다. 목욕하고 나니 나무들이 더욱 생기가 넘친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에서 내렸다. 도산대로 공원 진입로에 ‘도산공원’이란 커더란 바위가 세워져 있고, 정문 양쪽에 도산공원․도산기념관 두 간판이 각각 붙어있다. 정문에서 바라보는 끄트머리 쪽에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정문에 우람하게 서있는 메타세콰이어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느티나무․플라타나스․은행․측백․소나무 등 큰 나무들이 울창하다. 곧 땀이 식고 오랜 장마에 덩달아 흐렸던 마음도 활짝 개었다. 평지의 근린공원이라 노약자들의 나들이 길로는 안성맞춤이다. ’73년 서울시가 마련했다고.

입구 왼쪽에서 ‘도산의 기상’이라는 커다란 돌비석이, 헐렁하게 풀린 우리들 정신의 나사를 바짝 죄어주는구나. 그다지 높지 않은 3,4 층 팔각석탑이 두 곳에 서있으며, 녹음 속의 새파란 맥문동 사이사이로 벤치들이 놓여있다. 그늘 아래로 산책길이 나 있고 운동 시설도 있으나 한여름 무더위 때문인지 인적은 한산하고, 새들만 부산하게 날아다니는구나. 한복판에 도산 안창호의 은색 동상이 우뚝 서있다. 애초에 세웠던 것이 부식이 심해 다시 세운 것이란다. 지금 이 나라를 안타깝게 굽어 살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담장으로 둘러있는 묘역 왼쪽으로는 가족들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작은 석판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안창호선생 이혜련여사 묘’라고 새겨진 검정 비가 가첨석(加檐石)을 머리에 이고 서있다. 뒷면에는 그의 얼과 업적을 기리는 비문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키 큰 단풍나무․배롱나무․목련과 키 작은 주목이 함께 손을 잡고 감싸고 있는 가운데, 안창호 내외의 합장된 묘가 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도산선생의 묘를 이장할 때, 미국 로스안젤레스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도 옮겨와 합장하면서, 이 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조국의 광복을 갈망했건만,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지병으로 출감한 후 ’38년에 서거한 것이다. 만약 그가 광복을 맞이했다면 해방 후의 정치적 격랑에서, 그 높은 파고를 어떻게 헤쳐왔을까? 이어서 시산혈해(屍山血海)의 6.25전쟁에서 어떻게 생명을 지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현재의 정계를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저 지저귀는 새들의 새털처럼 가볍게 산책을 즐기자고 훌쩍 집을 나섰는데, 이런 부질없는 생각에 무겁게 잠겨 한참 동안 묘역과 동상 앞에 머물러 있었다.

두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떠받들고 있는데, 이 등에 불이 꺼져있어 오늘날 이 나라가 이렇게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일까?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 한 길이다’

‘그대가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군데군데 새겨져 있는 그의 어록(語錄)들이 가슴을 저민다. 그의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을 떠올리며 공원을 나왔다.

5개월 후 첫 겨울. 약속대로 다시 찾아왔다. 소나무와 측백은 더욱 푸르지만, 커다란 갈색 낙우송 잎이 이름대로 비처럼 떨어지고, 울창했던 다른 나무들은 알몸을 드러낸지 오래다. 그러나 울긋불긋한 단풍과 화살나무가 얼마나 고운지. 묘역에 쌓인 단풍잎들은 유달리 핏빛 같다. 오밀조밀하게 꾸며놓았던 할머니꽃밭도, 새득새득한 풀잎들 사이에 연보라․노란 들국화 몇 송이만이 대머리 정수리를 가리고 있구나.

오늘은 기념관에 오래 머물기로. 입구의 커다란 비석에 ‘愛己 愛他’와 ‘協同’이 새겨져 있다. 현관 앞 한반도 지도에는,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인내 독립’ ‘공의 공도’ ‘빛과 빛의 만남의 길’ ‘최강의 나라가 되어 최선의 성군이 되라’등 어록이 씌어있다. 이렇게 도산공원은 한 마디로 어록의 공원이다. 성장과 구국운동, 미주 활동기, 3.1 임시정부 활동, 대독립당 활동, 국내활동과 서거... 순서로 각종 유품․유물, 사진, 기록물․자료 등이 잘 전시되어, 그의 좌상 앞에 서니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다.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각종 서적들을 발간 보급하고, 도산사상 학술 연구, 초․중․고학생 현장체험 학습장 활용, 나라 사랑 겨레 사랑 문화행사를 갖는 다는 것이다. 그는 평안남도 강서군의 도룡섬에서 평민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교육자와 사업가․정치가로서, 독립운동가․애국지사로서 이렇게 빛나는 업적을 쌓으며, 역사의 한 장을 열었다. 한 사람의 힘이 이렇게 위대할 수 있을까? 실로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국민 5대 정신으로 ‘자주․진리․협동․개조․애국’을 주창하며 실천하였던 민족의 영원한 스승!

자유와 평등 구현에 앞장 선 그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미국 애틀란타에 있는 마틴 루터 킹 센터를 운영하는 트럼펫 어워즈 재단에서, ‘명예의 전당’에 그의 헌액이 새겨진다.(2012.1.6)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이라는데, 앞으로 그의 동상도 세울 계획이라고.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 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유훈을 되새김질하며 기념관을 나왔다. 그의 후광 때문일까, 겨울 햇빛이 더욱 찬란하고, 나를 배웅해주는 상록수들이 유난히 새파랗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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