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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지하철 6호선 합정역에서 내려, 먼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들어갔다. 정적이 온 몸을 감쌌다. 구한말에서부터 일제강점기에 입국한 후, 선교․교육․의료․개몽․독립을 위해 헌신,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을 이루다가 순교한 선교사와 그 가족 145명이 안장된 성지이다.

보호수 느티나무가 서있는 기념관에 잠깐 들렀다. 계단에 전시된 선교사들의 그림․사진을 둘러보고, 나와서 곧바로 묘역으로. ‘大韓每日新聞社長大英國人裵說之墓)’라는 돌비가 가첨석을 이고 우뚝 서있다. 한강을 굽어보는 양지 바른 곳에, 여러 모양의 돌비석을 앞 세우고 나지막한 봉분들이 파란 잔디를 덮고 고이 누워 있었다. 부분적으로 마모된 비석도 있고, 볼만한 꽃밭과 쉴만한 그늘진 벤치도 없다. 아무 데나 앉아서 쉬거나 서서 묵상 기도할 수 밖에. 간혹 꽃다발이 놓인 비석이 쓸쓸함을 덜어줄 뿐, 방문하는 발걸음도 뜸하고 여남은 명 단체는 오직 한 팀이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할 것 같은데, 살아있을 때의 명성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우리들 인간사인가 싶다. 아무래도 낯익은 이름 묘 앞에서 오래 머물고, 묘비명을 자세히 읽어보게 된다. B묘역에서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헐버트 비석 앞에서 숙연해졌다.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절절한 이 말. 그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건국훈장을 받은 분이다. 한 참 후에 보니 어느 청년이 그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선교사를 꿈꾸는 신학생일까? 스크린턴은 이화학당을 열어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였는데, 이화여대에서 특별히 기념비를 세워 이를 기리고 있었다. 또한 여성 복음화에 헌신한 켐밸,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의 묘비명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하여,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으며,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설립한 아펜젤러, YMCA 운동의 개척자인 브로크만도 이 묘역에 있다. A묘역에서는 한글 성경 번역에 크게 공헌한 레이놀즈, 백정 해방과 전도의 개척자인 무어, 일생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구세군의 위더슨의 묘가 있다. C묘역에서는 의료 선교사로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 퇴치에 공헌한 로제타 홀과, 제중원에서 의사로 일하다 최초로 양화진에 안장된 헤론. 특히 1000여 명의 고아들을 길러낸 일본인 소다가이치(曾田嘉伊智) 부부.

특히 맨 아래쪽 F묘역에 관심이 많이 갔다. 언더우드(元杜尤) 가족 묘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서 새문안교회․연세대학교 설립 등 그의 발자취가 없는 곳이 없으며, 원한경․원일한 등 대를 이은 선교사와 가족들의 묘가 있다. 원요한을 마지막으로 119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였는데,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위대한 공헌을 한 집안이다. 땀 흘려 근대 문명의 처녀림을 개척하고, 눈물을 흘려 복음의 황무지에 씨를 뿌리다가 이 땅에 묻히게 된 분들께 감사하며 양화진공원으로. 한강을 통하여 침범해온 외적을 물리친 유적으로서, 양화진 터와 장대석만 남아있고, 주위는 편안한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몇몇 노인들이 조용하게 쉬고 있었다.

3개월만인 10월. 이번엔 절두산 순교성지로 들어갔다. 천주교는 개신교보다 100여 년 앞서 전교된 유구한 역사와, 처참한 순교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만큼, 성지가 잘 조성․관리되고 있었다. 우선 외형적인 경관이 짜임새 있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순례와 휴식을 위한 시설들이 잘 정비되어 있다. 먼저 박물관에 들렀다.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수 천명의 순교자를 낸 역사적 유물과 유품 약 3,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곳. 신자들의 문초(問招) 기록, 한글역 성서의 효시인 ‘직해광익’, 이승훈의 영정과 정약용․이수광의 친필 등이 소장되어 있었다.

체험관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도 모르게 마음의 옷깃을 여미었다. 입구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포승에 묶이어 끌려가는 장면을 인형으로 전시해 놓았다. 박해 시대 고문을 받았던 각종 형구들을 둘러보면서, 일제 강점기에 못지않은 고문에 전율을 느끼었다. 동굴 감옥에 들어가 직접 배교를 강요당하는 체험을 해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체험관을 나와 ’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흉상 앞을 지나, 절두산 순교자 비 앞에 섰다. 잠두봉에서 한강으로 빠뜨리거나, 일부는 참수형을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 부른다고. 그 중 24위는 시복(諡福)을 하였는데, 목이 없는 나무 조각이 처절하게 세워져 있다. 16,7세 되는 소년도 낀 잔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저 절벽 아래로 목이 떨어져 구르고/ 선혈 낭자하게 흘러/

절두산이라 이름 붙여진 오늘날까지/ 암벽엔 순교의 핏빛이 그대로 배어있다....’는 이석수의 글을 보면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고 한 초대

교회 교부 터툴리안의 말을 떠올렸다. 쇄국정책에 따른 대원군의 척화비와, 최초의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살펴보고,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부활까지의 고난의 15 장면이 부조와 함께 세워져 있는데, 성모 동굴 앞에서처럼 여인들은 합장 또는 묵주 기도를 하고 있었다. 성지 밖 주차장에는 절두산 순교 기념문에 33 명의 순교자 부조가 4면에 새겨져 있었다.

이와같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 말미암아, 오늘 날 신․구교를 막론하고 한국에서 크리스트교의 꽃이 활짝 피어있는 게 아닌가? 이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현지에서 이미 순교하고 있는 분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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