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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갑자기 영하의 날씨. 가까운 공원에나 가야지. 여느때처럼 종로2,3가 거리는 노인들로 북적거린다. 그 동안 가까워서 멀었던 종묘. 40년도 더 지났다. 들머리에 ‘오래 사는 것 보다 당당히 살고 싶다’는 프랑카드가 걸려있다. 일본 소설가 스노 아야코가 ‘당당하게 늙고 싶다. 나이가 아무리 젊어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잊고 있다면 이미 노인이다’고 한 말을 인용한 듯. 그런데 앞 광장공원 한쪽 구석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왁자지껄하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외국 관광객이 이렇게 붐비는데...음성은 젊지만 배려가 없으니 과연 노인이다.

하루 1000여 명의 노인들이 밀물 되어 모여드는 노인구(老人區). 그런데 이곳에도 38선이 있어, 보수와 진보 양진영으로 갈려 이따금 열띤 설전을 한다지. 지금도 대선을 앞두고 현대판 만민공동회가 열린 것인가? 언성으로 보아 인신공격이나 네거티브일 게 뻔하다. 이에 아랑곳없이, 고운 단풍 나무 아래 벤치는 장기․바둑을 두는 사람들로 빈 자리가 없다. 세 발로 걷는 사람만 몇몇 눈에 띌 분, 운동 모자를 썼거나 염색을 해서 흰 머리는 안 보인다. 노령화 시대 맞나?

하마비(下馬碑). 이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리란다. 거룩한곳이라는 뜻이지. 조선시대 역대 왕가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이니 그럴 법 하다. 이상재(李商在) 선생 동상 앞. 대선을 앞두고, 이 월남(月南)선생과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나타났으면...3시 20분이 되어서야 외대문을 통과. 문화재 해설사의 설명에 귀 기울이면서 1시간 동안 관람했다.

어릴 적에는 유교 전통에 따라 지방(紙榜)을 붙여놓고 제사를 지냈다. 그 신위(神位)에 절을 올리면서, 얼굴도 모르는 조상의 혼이 정말 깃드는지, 무섭기도 하고 신비스럽기도 하였지. 기독교인이 된 지금은 추도예배를 드리지만, 조상 숭배 사상만은 좋은 전통 문화인 것 같다.

제사를 모시고 준비하는 공간이 따로 배열되어 있는데, 중심 건물인 정전과 영녕전 모두 종묘(宗廟)에 걸맞은 어떤 장식과 기교는 없이 무척 단조롭다. 오히려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라는 해설. 많은 중국인 관광객이 둘러보고 있는데, 그들의 눈에는 볼품없겠지. 그러나 중국․베트남과 달리, 건물과 함께 제례와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제례 및 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향나무가 서있는 지당(池塘)을 비롯해서 주위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몇 백년 동안 신주를 모셔온 종묘와 함께, 묵묵히 종묘를 지켜온 저 아름드리 나무들의 나이테에도 흥망성쇄가 있을까? 상록수와 낙엽수, 거목과 관목, 갖가지 빛깔의 단풍과 흐드러지게 열린 홍시까지 한데 아우러져, 고즈넉한 종묘에서 은은한 역사의 향기와 함께 산뜻한 자연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참나무 6형제들도 다 모여있는 듯 한데, 원인 모르는 시들음병이 걸려 비상이 걸린 모양.

가시는 있지만 곱고 향기로운 장미꽃으로 왔던 종묘를, 흰 머리에 허리 굽은 할배꽃(할미꽃) 되어 다시 찾아오니 만감이 교차한다. 젊음을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닌 것 같이, 이 늙음도 과실로 받은 벌이 아니지 않는가?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떠안아야할 현실이라면 저 노송처럼 순응하면서 푸르게 살아야지. 과거사를 정산하고, 비교하는 마음을 없애며....인생 1막은 힘참으로, 2막은 조직 브렌드로, 3막은 자체 브렌드로 살아야 한다는 어떤 분의 말을 곱씹어봐야 하겠다.

외대문을 나오니 다시 노인구. 왜 이곳에 모였을까? 이제 해가 설핏하면 썰물이 될 텐데,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나? 저 어슬렁거리는 여인들이 소위 박카스 아줌마․소주 아줌마들인가? 내게는 접근한 사람 하나도 없으니, 이미 한물 가서 별 볼 일 없는 늙은이로 보이는가 보다. 이곳을 취재한 기자들의 르포를 보면, 짝통 비아그라를 먹고 일탈한 노인들의 이야기가 심각하다. 런던대 루이스 월포드 교수 저 ‘당신 참 좋아보이네요!’의 통계에서, 노인에게 과거로 돌아가면 인생에서 바꾸고 싶은 것을 물었다. 3위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2위가 저축을 더 많이 하겠다. 1위는 성관계를 더 많이 맺겠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 60세 이상 노인들 62.4%는 성생활을 즐긴다고 한다. 그런데 성역(聖域)인 이 일대가 성(性)시장으로 변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기야 성경상의 바알 신전에서는 음란 예식이 공식화 되었지. “늬들이 제2의 사춘기를 알아?”라고 묻는 이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대답은 뭘까? 박범신 작 ‘은교’를 떠올리며 공원을 나왔다. ‘영원히 젊은 영혼과 욕망’에 바탕을 두고, ‘더 이상 정념에 불타지 않은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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