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이틀 동안의 가을비가 떠날 채비를 하자고 조른다. 하기야 오늘이 입동. 더 춥기전에 산에 오르자.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에서 하차, 곧바로 기원정사 모퉁이쪽으로 입산. 가랑잎이 쌓인 걸 보면 가을은 깊었다. 비교적 완만한 흙길과 나무 계단이 번갈아 이어지면서 수월하게 걸었다. 연로한 등산객들도 눈에 띄어 안심.
연기석의 시 ‘아차산호’에서 고구려의 냄새가 풍긴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자, 중원을 차지하려는 백제․신라와의 결전이 불가피한 상황. 고구려는 이곳을 요새(要塞)로 삼아 격전을 치른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유적임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
길목마다 크고 작은 돌무더기를 탑처럼 쌓아둔 것이 이색적이다. 한참 올라가니 드디어 제3보루. 경주의 옛 왕릉을 본듯. 잔디가 없이 민둥민둥한데, 그루터기가 많은 걸로 미루어 나무들이 빽빽했던 같다. 보루를 가로 질러 올라가니 ‘아차명물 소나무’ 2호. 자그마한 나무인데 밑동에서 여러갈래 뻗어올라 하늘을 향해 치솟는 붉고 생동감 있는 수간(樹幹)이, 고구려의 씩씩하고 용맹스런 기상을 상징한다고.
서울과 구리시의 갈림길, 해맞이 광장에 이르렀다. 정오가 지났는데도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 원경은 물론 한강도 희미하다. 2보루․4보루를 차례로 지나면서 흙길은 돌길로 바뀌었다. 게다가 경사도 급해지면서 숨이 턱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유치환의 시 ‘바위’로 보아, 바위가 많을 것을 예감. 아차! 불암산처럼 육중한 바위들이 길목을 막고 누워 있어 바위가 곧 길이다. 바위를 피해 돌아가면 또 다른 바위...미끄러질새라 벌어진 바위 틈새에 발을 딛고 가까스로 올라갔다.
마침내 5보루. 주위를 돌무더기로 쌓았고 규모도 크다. 개방되어 꼭대기에 올랐는데 고구려의 혼이 살아있는 느낌. 통일신라의 토기 조각도 발견되었다니, 삼국의 격전지였을 것이다. 건너편에 용마산이 솟아있어 능선으로 아차산과 연결 되었다. 285m 밖에 되지 않은 나지막한 산인데도 힘겹게 올라왔다. 나이 탓이려니...1시가 되어 요기를 한 후 예정대로 돌아섰지. 능선을 따라 올라온 바위 길을 피해, 계곡을 따라 흙길로 하산하기로. 문득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생각났다. 고구려는 중국 지방정권이라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 당의 초대 황제 고조가 고구려 영류왕에게 보낸 공문에서, 금이국통화(今二國通和)했으니 수나라 포로 1만명을 돌려달라 한 것은, 독립국가임을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인적이 없는 하산 길목에서 우연히 백제3층석탑을 만났다. 사람의 왕래가 있고 따라서 길이 나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오솔길은 뚝 끊어지면서 갑자기 낭떠러지다. 계곡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가니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물따라 내려가면 들머리겠지....‘아차!’ 추측은 빗나가고 절벽이 계속되어 불암산의 전철을 밟은 듯한 악몽이 떠올랐다. 눈에 띈 초소를 향해 내려가는데, 철조망의 보초병이 위험하니 되돌아 가라는 신호다. 발걸음을 돌리려니 눈앞이 캄캄. 하는 수 없이
간신히 계곡을 탈출 제2의 능선을 따라 다시 등산. 처음 오르던 나무 계단이 아득히 멀었다. 거기까지 되돌아가는 일은 엄두도 못 낼 판. 새 길을 트는데 이건 등산이 아니라 탐험이요 암벽 등반이다. 원숭이가 되어 아슬아슬한 곡예로 바위를 오르는데, 썩은 삭정이가 손에 잡히거나, 풍화된 바위와 젖은 낙엽이 발에 밟히면 곧 추락이다. 나도 모르게 ‘아차!’를 수없이 반복. 궤도의 탈선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재삼 깨닫다.
중턱 쯤 오르니 마침내 길이 나타나고 두 여인을 만났다. 등대가 따로 있나? 비로소 안도. 사람얼굴바위를 내려와 장승 길을 지나니, 장난감 같은 집들이 들어선 고구려 대장간마을이란다. 3시 20분. 2시간 남짓 헤매다가 엉뚱하게 구리시로 내려온 셈. 집에 와 옥편을 폈더니, 峨와 嵯 둘 다 산 높을 ‘아’‘차’가 아닌가? 그러므로 ‘아차’는 산이 높고 바위가 험한 산이란 뜻인데, 사전에 정보가 부족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조선 명종 때의 명성이 높은 점쟁이 홍계관의 전설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곧 쥐가 든 궤 안에 몇 마리가 들었느냐는 숫자가 틀려 사형을 하려는데, 암쥐를 개복하고 보니 새끼들이 들어 있어, ‘아차!’ 하고 사형 집행을 중지했단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그의 뒷산을 ‘아차산’이라 했다는 것. 한편 온달장군의 전설도 얽혀 있군.
공원 산책이 등산으로 바뀌어 재미는 있지만, 나이와 건강 문제로 무리 같다. 그래도 이렇게 해서 서울 인근의 산들은 거의 답사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