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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아직 10월인데 기온이 급강하. 밀린 숙제를 해치우려는 듯 조바심을 안고,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에서 하차. 공원 입구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5시.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 길게 벋은 아스팔트 길로 나왔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산책 나온 몇몇 사람에게 물었으나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을 분간하지 못한 채 모두 흐리멍덩하다. 발갛게 색칠된 쪽으로 이끌려가니 화살나무에 불이 붙었다. 이제는 난지천공원 표지판까지 나타나 나를 유치하려고 삼파전(三巴戰)이다. 정말 어리벙벙.

문득 흙길로 바뀌었다. 이른바 메타쉐콰이어 길이다. 이제 제대로 들어섰다는 생각에 안도감(安堵感). 그런데 일직선으로 곧게 벋은 길에 소실점이 안 보인다. 벌써 땅거미가 내려 거무스름한 나무 형체만 줄지어 서서 으스스하다. 불현듯 브레송(Bresson)의 흑백 사진 ‘프라도로 가는 길’을 연상. 앙상한 가로수를 배경으로, 검은 망토를 걸친 채 시가를 입에 문 노 신사가 문득 뒤를 돌아본다. 걸어온 길을 뒤 돌아보는지, 누가 부르는지...그는 다시 몸을 돌려 가로수 사이로 천천히 걸어갈 것이며, 마침내 저멀리 소실점으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붉은 단풍을, 그리고 원경(遠景)에는 붉으스레한 저녁노을을 채색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지.

때마침 붉으스레한 구름 한 조각이 빛나는 금테를 두르고 소실점 위에 나타났다. 드디어 노을공원 이름 값을 하려나보다. 그러나 그야말로 맛배기. 노을은커녕 어둠이 자락을 넓게 펴려고 서두른다. 단풍이 들었는지, 낙엽이 떨어지는지 온통 숲은 암회색. 태양의 장엄한 다비(茶毘)를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나는 이글이글 타는 불덩어리가 되어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낙조(落照)나, 시뻘겋게 타다가 조락(凋落)하는 단풍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를 모처럼 찾아왔는데....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그 앞 뜰의 조각들은 형체만 보일 뿐, ‘버려진 땅을 생명의 공간으로’라고 새겨진 비석은 뚜렷하다. 쓰레기 매립지가 자연 생태 공원으로 변신한 것. 그래, 저 공원대장군․수호여장군 장승이 잘 지켜주겠지. 서쪽 하늘만 바라보고 무작정 걸었다. 드디어 정상. 널따란 산마루에 여러 채의 오두막과 정자가 덩그렇다. 이곳에서 한강변의 야경을 조망(眺望)하며, 다리를 주무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려갈 길이 바쁘니까 말이다. 이곳에 산다는 고라니․삵․너구리․뱀에게라도, 절뚝거리는 다리와 흐늘거린 사지를 보일 수야 있나. 몸을 곧추 세우고 가슴을 활짝 폈다. 바람의 광장을 지나는데 두둥실 달덩이가 떠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이 16일, 아직은 보름달이다. 저 달이 아니라면 칠흑 같은 밤이겠지. 달빛에 몸을 씻은 억새가 유난히 순백색으로 하늘거렸다. 날더러 모자를 벗어보란다. 요놈들 봐라! 누구 머리가 더 센지 내기하자는 것이냐? 그래 난 대머리다!

길가의 코스모스들이 가슴츠레한 눈으로 딱하다는 표정. 한참을 내려왔는데 제 자리로 돌아왔다. 개미 챗바퀴 돈 셈이다. 아찔했다. 북극성도 보이지 않아 달이 아니면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시편 23편을 암송하며 나를 추스렸다. 가로등이 앞길은 밝혀주었으나 눈이 부시어 오히려 먼 곳은 껌껌했다. 골프장․켐핑장을 지났는데도 다 온 것인지 아직도 멀었는지. 다시 메타쉐콰이어 길이 나타나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멀고 먼 이 길을 또 터벅터벅 걸어야한다니. 그 옛날 좋아했던 헤르만 헷세(Herman Hesse)의 시 ‘방황’을 읊으려 해도 영 가물가물하는구나.

뜻밖에 빈 맹꽁이차가 나타나 무턱대고 탔다. ‘진짜 맹꽁이 영감이 타네?’ 운전기사가 이렇게 생각했겠지. 1분도 채 안 됐는데 종점이다. 2000원이 아까웠지만 그래도 다 내려왔으리라고 자위. 그런데 여기서부터 또 방황. 큰 빌딩과 아파트만 드문드문 보일뿐 경기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 어이없이 반딧불이 생태관이 나타났다. 그럼 아직도 노을공원에 갇혀있다는 말인가? 쉴 새 없이 줄곳 걸었는데도...달은 밝았으나 안내판 글씨는 희미하다. 모처럼 산책하는 분에게 물었더니 정 반대 방향으로 온 것. 길 잃은 이 나그네, 되돌아가야 한다니 눈앞이 더 캄캄했다. 지난 내 반생의 나그네 길이 실루엣(silhouette 프)으로 떠오른다.

경기장에 오니 벌써 8시. 드디어 세 시간 동안의 노을 구경 아닌 달 마중, 산책 아닌 고난의 행군에 마침표를 찍은 셈. 어렸을 적에 무지개와 단풍 그리고 노을은 왜 곱고 아름다운지, 이 세 가지가 늘 궁금했는데, 인생 황혼 길에 선 지금도 이 세 가지는 볼수록 곱고 아름답기만 하다. 이에 매료되어 길을 떠났던 집시(gypsy)는 지금도 이렇게 걷고 있다. 내가 사막 지방에서 태어났다면 신기루(蜃氣樓)를 찾아 헤매고, 북극 지방에 태어났다면 오로라(Aurora)에 넋을 빼앗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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