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지하철 2호선 서울대역에서 내려 버스로 환승, 서울대 정문 앞에서 하차. 바야흐로 등산철.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다. 교직에 있던 젊은 시절 아이들 소풍 때 한두번 왔을뿐, 관악산 등산을 즐기던 60대 때도 별로 다니지 않은 길이다.
미당 서정주의 ‘관악구에 새벽이 오면’ 시비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한봄에 철쭉꽃 뿌리는 꽃필 채비를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사랑마저 잊었으며, 강감찬 장군의 넋이 서려있는데, 왜 쪼무래기로만 남으려느냐고 읊고 있다. 이곳 출신으로서의 애향심을 노래한 것. 가을도 중순인데 담쟁이 덩굴과 몇 그루 단풍나무․붉나무만 빨갛게 물들었다. 주종을 이룬 참나무들은 약간 노릇노릇할 뿐 아직은 푸르다. 초록 숲길로 들어서는데, ‘나무는 시. 숲은 소설’이란 글귀가 씌어 있는가 하면, 또 한 곳에는 ‘나무는 악기 숲은 콘서트홀’이라고도 씌어 있다. 그래서 산을 찾고 숲길을 걷는 게 아닌가?
호수공원 쪽으로. 옛날 두살배기 우리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는 수영장이었는데, 지금은 인공 호수로 개조하여 공원이 되어 있다. 작은 무지개 다리를 건너니 큰 괴석이 탑처럼 서서 날 맞이한다. 조선 영․정조 때 시․서․화로 이름을 떨쳤던 자하(紫霞) 신위(申緯)를 기리는 동판 좌상과 자하정이 서 있다. 분수는 벌써 겨울잠으로 들어간듯, 호숫가 갈대들도 월동 채비를 하고 있다.
왼쪽으로 계곡을 끼고 산을 오르는데, 온통 돌길이다. 관악산이 돌산이라지만 돌이란 돌을 모조리 갖다가 쏟아 부어 놓은 것 같다. ‘돌은 시 바위는 소설’ ‘돌은 악기 바위는 콘서트홀’로 바꿔 불렀다. 가파른 길은 아니지만, 울퉁불퉁한 돌들을 밟으며 비탈길을 오르는 건 여간 힘드는 게 아니다. 나무들과 얘기 하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게 등산의 묘미인데, 헛디딜까봐 땅만 살펴야 한다니 이건 김샌 게 아닌가? 길가에 들꽃이라도 피어 있으면 눈 요기라도 하련만... 맑은 계곡 물이 흐르니까 망정이지 쉬 지쳤을지 모른다.
운동 기구와 휴식 시설이 마련된 넓은 광장을 지나 칠성당 계곡은 생태계보전지역이라고. 성주암․삼막사 등산은 접고, 무너미 고개에서 요기를 하고 발길을 돌렸다. 내리막길도 역시 힘들었다. 걷는 것도 이렇거늘 이 돌길을 닦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도 돌과 싸우며 계곡과 물놀이장을 정비하는 분들의 땀방울 앞에서 내 땀은 이내 식어버렸다.
아뿔사! 호수공원을 지나 야외식물원을 둘러보는데 눈알을 빼놓고 온 게 아닌가? 황당했다. 어느 쉼터에 놓고 왔겠지. 찾아나서려는데 다리 힘이 빠진 듯. 맞춘지 8년이나 되어 다 낡았으니 포기할까 몇 번 망설이었지. 홀로 남겨 둔 채 훌쩍 떠나간 내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넋을 잃고 혼자 어이없이 앉아 있을 그가 안쓰러워 발걸음을 되돌렸다. 20분 동안 다시 산을 올라가서야 드디어 어느 벤치에서 안경을 찾았다. 노여워 입을 다물고 애써 봇 본채 토라져있는 그를 집어들었다. 조금 전 호수공원 자하정에서, 숨어 있는 엄마 아빠를 찾느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울던 아이가 생각났다.
올 때 지나쳤던 길쌈박물관.농촌풍경학습장을 잠깐 들렀다. 작은 규모지만 사계절을 모르는 온갖 화초들이 자태를 뽐내는군. 잃었다가 되돌아온 눈알은 더욱 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