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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걸으며

걷고 쉬고 생각하며

by 최연수 Jan 28. 2025

 산보는 일과이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지만, 직장과 교회를 은퇴한 후 이렇게 즐기고 있다. 60대까지만 해도 등산을 했는데, 지리산 등반 때의 무릎 탈골 이후에는, 가벼운 산보만을 한다. 날씨가 궂거나 밤에는 반포천 허밍웨이나 한강시민공원을 걷고, 평소에는 국립현충원을 걷는다. 현충원은 눈 감고도 걸을 수 있을 만큼 젊었을 적부터의 산책길이다. 

 피톤치드․음이온 따위의 단어를 알지도 못했다. 어려웠던 시절, 절에 들어갈 처지는 못 되어 절 근처 숲속에서 공부하였다. 하이델베르그의 숲길처럼, 거닐면서 개똥철학에 심취하기도 하고, 산새․들꽃들을 벗 삼아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였다. 가슴 속의 응어리를 노래로 풀며, 옹달샘처럼 솟아나는 상념들을 글로 쓰기도 하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곳 절간 해우소에다 뒷거름 적선도 하고, 산을 내려올 때는 삭정이를 꺾어와 땔감으로 쓰면서 가지치기도 도왔다. 마침내는 산상 기도 중인 할아버지로부터 곧 ‘길’이신 예수를 영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나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흙과 나의 숨결이 배어있는 나무들이, 곧 내 고향이요 아버지의 집이요 친척이 되어, 40여 년동안 떠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되고자 하였다. 해외는커녕 국내여행도 맘대로 못한 개구리요 개미의 팔자이고보니, 우물에서나마 뛰쳐나오고 채바퀴에서나마 벗어나고자, 서울의 공원을 가나안 땅으로 알고 훌쩍 떠났다. 지난 5월 말부터 9월 말까지 30여 군데의 공원을 거닐었다. 나무와 숲, 잔디밭과 화초, 연못과 분수, 조형물과 쉼터....어디를 간들 별 뾰족한 것이 있으랴. 그러나 공원도 얼굴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며, 성장과정도 다른 것을 깨달으면서, 이제는 새 친구를 만나고 마치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설레임으로 오늘도 떠난다.

 희수가 될 때까지 이 국산품 큰 고장 없이 써온 것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나이에 장사가 없듯이, 눈과 귀․목소리도 낡아지고, 다람쥐 같았던 다리도 가끔 시큰거린다. 오른쪽은 발가락부터 발목․무릎․허리까지 한 번씩 빨간 불이 켜졌고, 지금도 엘로우 카아드가 꺼내어진 상태이다. 그러니 앞을 바라보며 뛰는 일보다는 뒤를 돌아다보며 쉬는 일이 많아졌다. 리모델링하면 백수까지 살 거라고 부추기는 사람도 있지만, 장수와 건강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게 아닌가? 로마 신화의 티토누우스는 제우스에게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 달라고만 했을 뿐, 불로의 몸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잊어, 늙어 쪼그라들기만 할뿐 죽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의 시발레도 아폴론에게 모래알만큼 장수하기를 부탁했을 뿐, 젊음을 유지해 달라는 부탁을 못해, 오그라져 병 속에 담긴 채 동굴 천정에 메달려 있지 않았는가?  

 걸음 ‘步’ 자를 보니까, 걸으면 (少)젊어지고, 계속 걷기보다 (止)멈춰 쉬기도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때는 땀이 약간 날 정도로 빠르게, 어느 때는 느긋하게 걷는다. 젊은 시절처럼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인생을 설계한다거나, 작품을 구상한다거나 하는 거창한 명분이 없다. 걷다보면 소년 시절 솔방울을 대포알로, 상수리를 총알 삼아 전쟁놀이하던 뒷동산 같은 공원이 있다. 갈퀴처럼 얼부풀었던 손을 따스하게 녹여주신 어머니의 엉덩이 같은 공원이 있다. 함께 자취하면서 메밀웅이를 내 양재기에 한 숟갈 더 퍼주던 누나의 손길 같은 공원이 있다. 깊은 우물에서 건져 올려 숭숭 잘라 시원하게 목을 추겨주신 할머니의 수박 같은 공원도 있다. 낙방한 나를 다시 도전하라며 수험료를 대납해주던 친구 같은 공원도 있다. 

 공원을 걷다보면 문득 문득 그런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나의 삶을 기름지게 하여 이렇게 걷는 것이다. 푸른 숲이 내 고향 같고, 꽃과 새가 우리 식구, 물과 바위가 나의 벗 같은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으랴. 공원이 나에게 손짓하는데 어찌 모른 체 할 수 있으랴. 걷자. 발목에 힘이 남아 있을때까지. 

                                     

교회 회지 ‘물댄동산’(2011.No30)게재. 은퇴장로 최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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