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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사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Jan 28. 2025

 어제 한나절 비가 오더니 쌀쌀해졌다. 박용래는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 마시며 가을 빗소리’(모과차)라고 노래했다. 가을이 오는가 싶었는데 떠나갈 모양이다. 소풍날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따끈한 매실즙을 챙겨 의정부로. 지하철 1호선 회룡역에서 목동 친구와 만났다. 그는 지난 봄 쓸개를 떼어내고, 또 간에 물혹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있는 중. 의정부 친구를 전화로 불러내었으나 한사코 안 나오겠단다. 마당발이었는데 한쪽 눈을 실명한 후 외출을 안 하려든다. 나도 일주일 전 관악산 등산 이후, 시큰거리는 무릎과 발목의 안전을 위해 압박붕대를 감고 나왔다. 팔십 고개를 넘는 일이 이렇게 힘드는가보다.

 그럴수록 자주 만나 맑은 공기도 마시고 회포도 풀어야 하거늘, 그게 그리 쉽지 않다. 몇 년 동안 자주 만난 편이었는데 최근 뜸해진 건, 이렇게 건강 때문이다. 가까스로 그의 처와 함께 꾀어내어 넷이서 늘 다니던 회룡사로 향했다. 정말 티끌 하나 없는 푸른 하늘에, 가을 비에 말갛게 씻긴 사패산에서는 갓 목욕하고 나온 여인의 비누 향기가 풍겨 나온다. 상크름한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몸이 새털처럼 가볍다. 

 비온 뒤라 계곡 물소리가 천상의 음악 같다. 사패산 꼭대기의 하얀 바위와 능선의 푸른 숲이 손짓을 했지만,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지. 눈 높이를 낮추고 주위의 풍광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400여 년간 우람하게 서있는 진입로의 화화나무는 아직도 젊음과 푸르름을 자랑하지만, 계곡을 중심으로 펼쳐진 단풍 병풍이 참 아름답다. “아, 좋다!”는 말 밖에 또 다른 말이 있으랴. 회룡샘에서 잠깐 쉬다. 용암 약수터로 가는 갈림길인데, 친구의 처는 여기서 쉬기로 하고 우리는 200m 지점 회룡사까지 더 가기로.

 차가 오를수 있도록 길이 넓혀지고 시멘트로 잘 포장 되어 평지를 걷는 것 같다. 비록 남성의 장엄함은 없으나, 굽이굽이 쏟아지는 폭포가 미소를 머금은 발랄한 소녀 같다. 어디까지 뻗어가는 것인지, 시골 담 장 같은 자연석 돌담의 아름다움은 덕수궁 돌담에 비할 바 아니다.

 회룡사.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법성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 태종 3년,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대궐로 돌아오던 중, 뜻하지 않은 일로 돌아가려던 것을, 이곳에 머물고 있는 무학대사가 마음을 돌려 환궁하게 한 사연으로 회룡사(回龍寺)라 개명했단다. 

 잠깐 쉬면서 친구들에게 전도를 했다. 때마침 회룡역전에서 받은 전도지로 말이다. 미국 수백만장자 구울드와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가 임종 때 남긴 말을 중심으로. 서울에 와서 사귄 50년 지기지우(知己之友)인데 아직도 구원시키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북한산 둘레길인데 돌아오기로. 우리 모두 80 고개를 넘는 조락(凋落)의 계절, 저 단풍처럼 곱게 물들었다가 어느 날 뚝 떨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안고 하산. 구수한 청국장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맑은 하늘에 화필을 빨아 우리들 추회(追懷)를 저 아름다운 추색(秋色)으로 울긋불긋 색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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