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나오면 통일로 도로변에서 시원스레 쏟아지는 폭포의 센 자력에 누구나 끌려가게 된다. 서울 서북부의 관문인 이곳에 관광 명소로 양화.용마에 이어 세 번 째로 이루어진 인공폭포라고(1997). 구파발은 우리나라 3대로 중 평안도로 가는 서발(西發)이 대기하던 파발(擺撥)터. 그 옛날에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폭포가 렌드 마아크가 된 셈. 북한산 등산객들에겐 만남의 장소로, 길가는 행인들에겐 잠시 쉬어가는 쉼터이다. 은하폭포(12m)는 건축물과 어울려 웅장한 멋이 있고, 쌍둥이 산성폭포(5m)는 주변 바위들과 어울려 계곡 느낌을 준다.
이전에는 금암폭포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구파발폭포라 이른다. 광장에있는 2 군데의 연못에서 안개 분수가 솟아오르면서, 시원스럽게 땀을 식혀준다. 이 모든 수경시설은 지하철 지하수를 활용한 것이라는데, 하루 세 번만 작동하기 때문에 이 시간을 놓치면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여러 종류의 조경 수목과 화초류가 자라고, 야외 공연무대도 마련되어 있어,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광장과 이어진 산책로에 빨려들어갔다. 걷기 위해 생겨난 내 두 발이 열린 산길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으랴. 나무 데크 계단을 올라가니 곧 흙길로 바뀌었다. 가파른 길이 아니라서 노약자들도 쉽게 오를 수 있다. 좁다란 길에 꽃들은 다 진 채 제멋대로 자란 잡목들만 빽빽하여 오솔길 느낌이 드는데, 산행하는 사람들마저 듬성듬성해서 퍽 쓸쓸하다. 군사시설보호구역 개발제한구역 푯말이 있어 평범한 산은 아닌데 이름이 뭘까?
게다가 웬 무덤들이 간간이 나타나 더욱 적적하다. 알고보니 조선 초․중기의 장묘문화가 집중된 매장문화재의 보고란다. 왕의 특별한 신임과 사랑을 받은 상궁과 내시들의 묘지가 즐비하다는 것. 도성 십리 밖이라야 묘지를 쓸 수 있는 ‘성저십리’ 때문에, 이곳이 도성 십리 밖에서는 가장 가까운 모양. 잘 관리된 분묘들은 사대부들의 묘인데 죽어서도 호강하는구나. 그러나 여기저기 목이 잘린 문인석과, 아들 낳겠다고 갈고 갈아 문드러진 동자상의 코가 애처럽고, 산사태로 흔적만 남은 무덤들이 퍽 쓸쓸하다.
어디가 어딘지 길따라 걷는데 문득 정자가 있는 쉼터. 벤치에 앉아 발 다리를 주무르다. 운동 기구들이 잘 마련되어 있는데 모두 하품을하고 있다. 한낮에서일까? 너무 외딴 곳에서일까? 진관고교 푯말이 가리키는 쪽으로 내리막 길에 들어서니, 아파트들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 시간 남짓 걸은 셈. 산 끝자락에 도착하니 진관근린공원이라는 큰 기둥이 서있다. 지금까지 산책한 곳이 근린공원이요, 이 산이 이말산(莉茉山-132.7m)이라는 것을 안내판을 통해서 비로소 알았다. 애초에 폭포 구경만 하러 왔는데 산책까지 했으니 임도 보고 뽕도 딴 셈.
길게 벋은 도로를 건너 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다. 팜플렛을 얻으려 했으나 아예 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삼각산교를 지나서 진관초교 앞 호수로. 호수라기보다 큰 연못이다. 산을 오르내릴 때는 머리가 시원하고, 물을 바라볼 때는 가슴이 후련하다. 관찰 데크에서 수생식물들과 인공 식물섬의 수목들을 바라보니 하지를 이틀 앞둔 대낮 한 더위가 싹 가셨다. 왜가리가 날아오고 맹꽁이가 산다는데 눈에 띌 리가. 건너편 진관교회와 베드민턴 운동장 뒤쪽으로 가면 생태공원이 나온다는데, 오늘은 이걸로 만족하기로. 산에 안기고 물을 안은 이곳 상림마을 사람들은, 이 푸른 산 같이 후박하고, 이 맑은 호수 같이 청순하리라.
산 모롱이를 돌아오는 마을버스를 보니, 이웃 고을 장 마당에서 흙 먼지를 일으키며 돌아오는 옛 시골 자동차 같이 정겹다. 늘어뜨린 수염을 비비꼬며 앉아있는 이웃집 할아버지와, 구수한 사투리로 장마당 품바 흉내내며 수다 떠는 건너집 아줌마들이 앉아 있다. 그러나 낡은 필림은 순간 끊어지고 반전, 맨 살을 거의 드러낸 아가씨와 노란 머리를 뻗혀올린 젊은이가 이열치열로 찰떡 같이 붙어 앉아 있고, 선그라쓰를 낀 아저씨가 맥고모자를 눌러 쓴 시골뜨기 차림의 나를 훑어보고 있다. 아 참 서울이지. 구파발역까지 오는 짧은 시간에, 오르내리는 별별 사람들의 얼굴 표정과 몸차림에 눈이 흐려, 산과 호수의 잔상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때마침 구파발폭포마저 쉬는 시간이 되어 참으로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