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창 밖 벚꽃이 흰 나비되어 흩날리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설렌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오늘이 4.19혁명 53주년. 4월의 한파와 폭설이 20년 만이라 했다. 가슴츠레 눈을 뜬 꽃들이 화들짝 놀라 움츠려들었다가, 때 아닌 여름 날씨에 온갖 꽃망울들이 폭죽처럼 한꺼번에 터진 일이 언제 또 있었던가? 그래서 올해의 공원 나들이가 이렇게 늦어졌다.
지하철 수유역에서 버스로 환승 곧 ‘민주성역 국립 四․一九 묘지’ 입구에서 하차. 막 기념식이 끝난모양. 정치적 구호로 가득 채운 프랑카드를 세운 시위대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24일 있을 노원병 국회의원 재선을 앞둔 때문이겠는데, 보기엔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곳이 어찌 자기들만의 성역이요, 민주주의가 자기들의 전리품인가?
저 멀리 우뚝 선 인수봉․만경대․백운대가 눈부시게 하얀 머리띠를 두른 채, 정의와 민주의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광장 가로등 위에는 비둘기들이 평화를 호소하고 있다. 상징문․기념탑․유영봉안소․정의의 불꽃 등 조형물이 일직선으로 대칭축을 이룬 가운데, 제1,2묘역과 수호창의비 심지어 연못까지도 좌우 대칭으로 매끈하게 정비되 있다. 바야흐로 생명이 약동하는 신록들과, 벚꽃을 비롯한 개나리와 진달래 등은 화사하게 꽃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피지도 못한 채 길바닥에 선혈을 뿌리며 낙화한 수 백명 학생들의 묘비는 묵묵히 서있구나.
기념탑 뒤쪽 부조들의 함성이 이명으로 들려오는 듯 해서, 걸으면서 기도만했다. 온 국민이 그 당시의 순수했던 민주정신으로 돌아가도록. 나는 스무다섯 살 햇병아리 교사로 교단에 서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미술 시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리고, 음악 시간에는 대통령 찬가를 가르치도록 지시했다. 국민학생 까지도 시위대열에 참가했던 역사의 현장에, 침묵으로만 응원했던 내가 지금 무슨 허튼 말을 뱉으랴.
시원스레 내뿜는 분수를 바라보며 연못가 벤치에 앉아 쉬었다. 때마침 네 아이가 다가와 인터뷰를 하겠단다. 상원 초등 6학년인데 과제를 해야 한다고. 여기 저기에서 이루어진 이 풍경 중에서, 시위하는 저쪽 사람들은 과연 무슨 말을 해주고 있을까?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 처럼, 지금도 부정 선거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고 하지는 않은가?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정권과 인권의 사각지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그들이, 순진한 아이들에게 의식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 같다.
나는 부정선거와 인의 장막에 갇힌 이승만 대통령의 실정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지고 대통령 직을 사임․하야했던 일은 곧 민주주의의 실천이 아니냐고 하였다. 그는 1주일 전 국무회의 석상에서,
“혹시 선거가 잘 못 되었다고 들은 일이 없는가? 여러분이 나를 속이고 있구나. 한 시 빨리 내가 대통령 직을 사면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한다.”
고 했던 사실과. 그 후 부상자 병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너희가 맞았다”
며 서러워 했던 사실이 곧 민주주의 정신이라고. 그 어느 독재자가 이렇게 권좌에서 물러난 역사가 있다는 말인가?
공산주의와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 6.25의 공산 침략을 물리치고 전후 복구와 한․미 동맹을 굳건히 했던 위대한 공로는 외면한 채, 역사의 죄인으로만 왜곡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지금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승만에 대해서 재조명하고 바른 평가를 해야 한다는 운동이 양식 있는 사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음은, 만시지탄이 있으나 다행한 일이아닐 수 없다.
이제 자라는 후손들에게 역사를 바로 보는 안목을 길러주어야지, 색안경을 끼운 채 역사를 삐딱하게 보게 하는 일 또한 역사의 죄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다시 교단에 선 기분으로 짧은 시간이나마 대한민국의 역사를 강의했다. 4.19 당시 민주 혁명의 열외에 있었던 일을 조금이나마 뉘우치는 의미에서 말이다.
수호창의비 앞에 세워진 많은 시비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뛰는 심장을 느꼈다. 내가 아직은 젊은 것인가? 문득 선친의 모습을 떠올리며 공원을 나왔다. 거동을 못 한 채 병석에 누웠던 아버님은, 4.19 혁명의 소식을 듣고 벌떡 일어나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소읍에서나마 평생 골수 야당으로, 자유당 독재와 맞섰던 옛 동지들을 만나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새로운 집권 세력인 민주당이 신․구파로 분열된 모습에 허탈한 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칩거하다가,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 직전에 작고하신 것이다.
지난 2월 3차 핵 실험 이후 무려 2개월 남짓, 핵 위협과 전쟁의 협박을 누그려뜨리지 않은 북한은, 마침내 개성공단의 출입을 통제한 채, 식량 의약품 반입까지 불허하고 있다. 남남 갈등을 부추기는 이런 전술에 부화뇌동하지 않아야 하거늘, 이에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세력이 어찌 4.19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