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회색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함박눈이 내릴 것 같다. 지하철 4호선 길음역에서 하차, 비탈길을 올라 새소리어린이공원을 지나 곧장 산으로. 난간을 붙잡고 지그재그 나무 층계를 따라 오르는데, 오늘따라 노곤하다. 깊은 잠을 못 잔 탓인지. 산책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주택가와 가까운 데다가 포곤한 날씨 때문일 것이다. 새 소리는 들리지 않고, 겨울 방학이라 여기 저기 아이들 소리만 들린다. 듬성듬성한 잣나무와 맥문동만 푸를뿐, 온통 갈색인 산등성이는 잔설로 희끗희끗하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담소정(談笑亭)이라는데, 쉬는 사람은 없고 스산한 바람만 쉬어 간다. 왼쪽 길로 돌아서니 깔끔하게 새겨진 김소월의 ‘진달래’와 윤동주의 ‘서시’ 돌비가 마주보고 서있다. 학창 시절 즐겨 암송했던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 했다.....
음력 동짓달 열엿새. 오늘이 일흔일곱번째 맞는 나의 귀빠진 날이다. 그 땐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렸다 했고, 오늘도 남녘에는 60년 만의 폭설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감질나게 눈발만 흩날릴뿐이다. 아스콘 길바닥에 무슨 발자국이 있을까? 내 회고록을 ‘그림자의 발자국’으로 했듯이, 팔순을 발부리 앞에 둔 이 날까지, 오로지 그림자로 살아온 내 삶인데 무슨 발자국을 남겼으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어야 하거늘, 저 응달의 잔설처럼 녹지 않은 흉터와 얼룩만 눈에 밟히는구나.
자연 학습장을 지나 마로니에 마당으로. 예닐곱 그루 칠엽수(마로니에)가 빙 둘러 서있다. 여름 한 철에는 시원한 그늘 방석을 넓게 깔아주어 대단한 사랑을 받았으리라. 잠시 화목정(和睦亭)에 앉아 쉬는데, 눈 위에서 어른과 함께 베드민턴을 치는 아이들의 엉덩방아가 귀엽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겠지. 운동 기구로 몸을 단련하는 사람, 마당 둘레를 씩씩하게 걷는 사람...활기찬 모습들이 참 부럽다. 우수 조망명소에서 먼 북쪽을 바라보니, 만경대․백운대․인수봉이 의젓하게 서있고, 발 아래는 아파트들이 키를 재며 발돋움하고 있다.
되돌아서서 담소정 오른쪽 길로. 또 박재삼의 ‘자연’과 박목월의 ‘청노루’ 시비가 맞이한다. 나도 자하산 아닌 개운산에 철쭉이 피면, 십장생 병풍 속의 사슴처럼, 한 마리 청노루로 변신하여 이 대자연의 품에 안길까? 고려대를 내려다보는 이 나지막한 산을, 고종 황제가 즉위하면서 나라의 운명을 새로이 연다는 개운산(開運山-132m)이라 했다지. 사흘 밤만 자면 일흔 아홉 살 새해를 맞이하는데, 나에게 새로운 운수가 열린다면 과연 무엇일까?
이 길이 숲속 여행길이라 하는데, 맑은 눈의 청노루가 되어 구름 따라 이런 숲길 이런 산마루를 마음대로 오르내렸으면...이 길이 또한 삼림욕장이라 하는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도록, 피톤치드로 목욕하여 지난 날의 묵은 떼를 깨끗이 밀었으면...그리하여 여든 고개를 거뜬히 올라섰으면 한다. 일흔 고개를 넘을 때는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는데, 여든 고개 들머리에서 나도 또한 젊은이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넋두리를 하고 있나보다.
5060대와 2030대의 대결이 된듯한 이번 대선에서 패배한 소위 진보측 젊은층들은, 꼰대들의 지하철 무임승차를 없애고, 자리를 양보하지 말자고 SNS에서 선동하고 있다. 한편 어느 쉰 살 역사 학자는, 경제학자의 예측이라면서 ‘2030년대에는 노인암살단이 생길지 모른다. 노인이야말로 사회적 비용만 늘리는 잉여인간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엘버트 브룩스의 미래 소설 ‘2030년 그들의 전쟁’에도, 일흔이 넘은 노인의 투표권을 빼앗자고 주장하고, 버스․요양원․노인 아파트에서 노인들이 폭탄 테러를 당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한다.
고려장보다 더 섬뜩하다. ‘명상의 숲’이라는 이 길에서, 고작해서 사냥꾼에게 쫓기는 청노루 모습을 떠올리며, 건강․장수 문제를 등에 지고 걷고 있다니...베드민턴장 등 이 공원에는 유달리 많은 운동 기구와 헬스장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성북구의회와 스포츠센타가 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특색이고. 이곳을 드나드는 저 5,60대들도, 무슨 진시황이라고 자녀들 눈치 없이 불로장수를 꿈꾸고 있지나 않을까?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운치나 있지, 어쩐지 갈빗대 엉성한 채 떨고 있는 저 나무들마냥 처량하다. 470 여 층계를 내려오니 종암동 주택가다. 한 해를 마감하는 세밑 마지막 공원 산책이다. 2012년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