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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폭포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눈이 부얼부얼 내린다.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역에서 버스로 환승 금천폭포공원 앞에서 하차. 금천구 방면으로는 첫 산책. 오리무중(五里霧中) 아닌 오리설중(五里雪中), 먼 곳은 앞이 보이지 않고, 우산을 받쳐든 사람들의 발걸음이 퍽 조심스럽다. 시흥대로 옆에 마련된 폭포. 절벽만 높다랗지 물 없는 폭포. 오리는 커녕 일리(一里)도 안개속 같이 혼탁했던 대통령 선거가 끝났으니, 그 잡음․소음을 폭포 소리로 귓속을 말끔히 씻어내었으면 좋으련만...그래도 고요해서 좋다.

곧 층계를 따라 올라갔다. 한 눈에 들어온 공원이 부잣집 안 마당에 들어선 느낌. 금천문화원이 서있어, 마치 문화원 정원 같다. 분수는 동면에 들어가 쓸쓸한데, 멀쑥한 키꺽다리 소나무들이 받침대에 의지하고 서 있구나. 마치 엄마 손을 붙들고 가까스로 일어선 돌장이가, 스스로 자랑스러워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 같다. 이 모습을 보고 앉아있는 영산홍과 회양목들이 눈 모자를 눌러 쓴 채 키득거리고 있군.

벤치는 많은데 눈에 덮여 앉을 수가 있나. 한 쪽 구석에 잠깐 앉아 가져온 매실물을 마시는데, 불현듯 따끈한 팥죽 생각이 난다. 오늘이 동지지. 붉은 색은 집안 잡귀를 쫓아낸다 해서, 한 해의 액운을 떨쳐버리고 새 해의 희망을 걸며, 나이만큼 새알심을 먹던 어릴적 추억이 새롭다.

아 참, 또한 오늘이 말세(末世) 날이 아닌가? 지구상에 대 이변이라도 나야 하는데, 이런 소동을 잠재우려는 듯 흰 눈이 내리어 푼푼하게 쌓이는구나. 고대 마야 달력이 B.C.3114년 8월 13일에 시작해, 13번 째 ‘박툰’(394년 주기)인 금년 12월 21일 끝난다는 것을 근거로 오늘이 지구 멸망의 날이라고 했지. 며칠 전 미국에서 종말론자인 어머니와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무차별 총살한 사건이 일어난 후, 오늘 임시휴교까지 하는 학교도 있다지. 외계인과 함께 지구를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지금 UFO의 기지가 숨겨져 있다는 구원의 마을 프랑스의 뷔가라슈에 모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을까? 정작 마야 문명의 근거지인 멕시코 남부와 과테말라에서는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날로 축제를 벌일 것이라는데...

노스트라무스의 예언과 기독교 세대주의자의 주장을 합성하여,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이 공중 재림한 이후, 7년 대환란이 일어난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종말론자들(다미선교회)은 또 어디서 뭘 할까? 지구가 종말이라는데 가장 확실한 자기의 종말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자기들만 살아남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것도 꼴 사납다. 그래서 성경은 그 때는 아무도 모르므로 깨어 있으라고만 하지 않은가? 전쟁으로 도시가 온통 화염에 쌓여 탈출 러시가 이어지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황에서, 창가의 화분에 물을 주던 어느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말도 귓가에 맴돈다. 이번이 아마 내 생애의 마지막 종말론이겠지.

산새 소리를 들으며 함박눈이 흐벅지게 내리는 숲 속을 눈사람 되어 거닌다. 흔적도 없이 눈 속에 파묻혀버린 내 발자국을 우두커니 뒤돌아본다. 이런 은세계를 그려보며 집을 나섰는데 아쉽게도 이곳엔 숲길이 없구나. 설혹 있다해도 이런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내 젊음도, 입을 크게 벌려 내리는 눈을 받아 먹던 동심도 눈처럼 녹아버렸지만. 멋있게 디자인했을 공원 바닥과 싱싱하고 아름다웠던 화초들, 그리고 종말론도 모두 눈 속에 묻혀버렸지 않은가? 햇살이 비치면 이내 녹아버릴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이번 대선에도 사람들은 얼마나 아웅다웅했던가? 해 아래 행하는 모든 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다 헛되고(전1:14), 하늘의 별이라도 딸 듯 날뛰어도, 내일 한 줌 흙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하찮은 존재가 인간인데...

아무도 없는 좁은 공원을 몇 바퀴 돌면서, 짧은 시간에 꽤 긴 생각을 했다. 조촐한 공원이지만 금천구의 렌드마크로 여긴단다. 폭포수가 시원스럽게 떨어지고 분수가 솟구쳐 오르면, 이곳 동네 사람들의 사랑 받는 쉼터로는 안성맞춤이겠다. 다만 교통이 불편하여 먼 곳에서 찾아오기는 어려울 듯. 층계를 내려오는데, 내가 걸음마를 배우는 돌장이가 되었구나.

늦깎이 돌장이

푸른 머리 돌장이 섰다! 섰다!.

받침대에 바들바들 기대어 섰다.

홀로서기 뻐기며 둘레둘레

늦깎이 소나무 손뼉치며 웃는다.

흰 머리 돌장이 걷다! 걷다!

펭귄 되어 한 발짝씩 걷는다.

덮이는 발자죽 뒤돌아보면서,

아무려니 세발로 걸으며 씁쓰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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