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12월 초 한파로는 56년 만이라고. 추위보다는 눈 때문에 발을 묶어놓았다가, 모처럼 수은주의 키가 크면서 눈이 녹기 시작했다. 용수철 퉁기듯 뛰쳐나와 지하철 5호선 종점 방화역에서 하차. 곧장 행길가 공원 안으로. 넓은 원형광장이 반가워 했으나, 눈인사만 하고 오른쪽 산길로. 강서둘레길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올라갔다. 경사가 완만해서 노약자들에게도 산책길로는 안성맞춤. 간간이 섞인 소나무와 잣나무만 푸르름을 자랑할 뿐, 주종인 참나무와 산수유․이팜나무등 다른 나무들은 모두 알몸. 며칠 전만해도 하얀 눈꽃이 만발했겠지.
여러 기의 무덤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옛날왕릉 후보지까지 오를 정도로 명당이었다고. 그래서일까 잘 손질된 호화묘도 있다. 해발 70여m의 치현산(雉峴山) 정상. 꿩 사냥으로 이름이 나 꿩고개로 불리워진 것. 내리막길은 눈이 녹아 몹시 축축하였다. 행길을 가로질러 이어지는 개화산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인지, 진흙길이 질퍽거려 되게 미끄러웠다. 그러나 가파른 길에는 목재 데크의 계단과, 양쪽에 로우프가 이어져 안심하고 올라갔다. 신라 시대 주룡이라는 도인(道人)이 살면서, 해마다 중양절(重陽節=9월 9일)이면 두세 명 동자들과 이 곳에서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을 했다 해서 주룡산(駐龍山)이 되었단다. 그가 죽은 후 이곳에 이상한 꽃이 피어나 다시 개화산(開花山)이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또한 이곳에 개화사가 세워졌는데, 좋은 약수가 나와 약사사(藥師寺)로 고쳐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부연 안개가 완전히 걷혀 시야가 확 트이었다. 바야흐로 은회색 한강과 주황색 방화교가 자태를 드러내었다. 과연 야경 출사(出寫)로 널리 알려진만 하다. 길목마다 쉼터와 운동 시설들이 잘 마련되어 대단히 편리한데, 다른 공원처럼 드문드문 시비라도 세워져 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련만...
웃통을 벗고 싶을 정도로 땀이 났다. 정오엔 하산하리라고 했는데 벌써 1시. 산을 오르다보면 앞 산 봉우리를 바라보고 돌아설 마음이 없지. 정상(179m)에는 6.25 때 김포공항을 사수하기 위한 격전지가 되어, 이 때 산화한 1,100 명을 기리기 위한 호국충혼기념비가 서있고 조망대가 있다니까 둘러보 싶었다. 그러나 정상을 코 앞에 두고, 힘들고 시간이 모자라 아쉽지만 되돌아 오기로. 나이 탓이겠지.
미끌어질세라 로프에 메달리다 시피 바들바들 떨며 내려오는데, 요놈 봐라!
‘할아버지, 겁도 많네!’
하며 딱하다는 표정. 어디선가 본듯한 분이라 생각하는지, 멈추어 서서 한참동안 나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녀석.
‘누리가 부활했나, 환생했나?’
옛날 우리 누리(시츠와 요크셔테리아 혼혈)를 똑 닮아, 나도 고 녀석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실례!’
그는 뒷 다리를 번쩍 쳐들고 싱겁게 쉬이...이내 뒤돌아보지 않고 신나게 산을 타고 올라가는구나.
아스콘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흰 운동화는 물론 검정 바지 가랑이가 황토로 뒤범벅이다. 산책이 아니라 진흙탕 논에서 김을 매었나? 마지막 방화공원으로. 사시사철 꽃 향기가 퍼져 개화산이고, 그 곁에 있는 꽃이어서 방화동(傍花洞)이라 한다지. 원형광장을 문화마당이라 했다. 한옥 초가를 중심으로 정자와 연못, 물레방앗간과 장독 등이 옛날 시골 냄새를 풍기고 있다. 새끼줄로 엮어 만든 여러 가지 동물들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간 들이 정겹다. 한옥 앞 넓은 마당에서는, 땅 따먹기․팽이 치기․제기 차기․그네 타기 등 전통 놀이 체험을 할 수 있는 모양.
문화 행사는 매주 토요일에 열린다는데, 오늘이 토요일인데도 넓은 야외 무대가 텅 비어 있어 쓸쓸하다. 소맷자락은 길지 않아도 멍석이 깔려 있으니 춤추고 싶어 어깨가 근질근질하는구나. 풍악은 없어도 올라가서 점퍼를 벗고 덩실덩실 춤사위. 지난 까리따스 발표회 때 선보였던 ‘매’와 ‘옹헤야’, 그리고 ‘노들강변’과 ‘새타령’이 레파터리. 문화행사는 내가 한셈. 건너편 스탠드의 아낙네들이 ‘웬 돈키호테야?’하고 넋 나간 듯, 자칭 이 돌팔이 인간문화재의 열연을 구경하고 있군.
대선을 며칠 앞두고 네거티브와 마타도어가 극에 달해, 머리가 흐리멍덩하고 가슴이 메스꺼운데, 누가 흉을 보거나 말거나 한바탕 신명나게 춤을 추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다. 나이들면 뻔뻔해지기 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