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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겨울 문을 노크하는 가을비가 달랑달랑 메달린 단풍잎을 톡톡 건들어본다. 조금만 더 머물고 싶어 몸을 옴츠러 보지만, 산들 바람이 그만 머뭇거리지 말라며 휙 스쳐가니 뚝 뚝 떨어진다. 그래, 때가 되면 가야지. 비가 멈추자, 옷을 두툼히 입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 5호선 고덕역에서 하차, 곧바로 명일공원에 접어들었다. 해발 100m도 채 안 될 나지막한 야산. 때 아닌 황사 현상으로 우중충한 날씨에 을씨년스런 모습. 한 때는 녹음방초의 청록궁(靑綠宮)으로 영화를 누렸으련만.

가랑잎 카펫은 비에 젖어 밟아도 서걱거리지 않고, 나뭇가지들도 숨을 죽여 괴괴한데, 두세 마리 직박구리가 날아와 뭐라고 재잘거린다. 반가와 휘파람을 불며 손을 흔들었더니 훌쩍 날아가버린다. 흔들리는 가지에는 머물지 않는다지만, 가지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데...

김병렬의 시 ‘가을비 내리고’와 조영희의 시 ‘님 가까이’를 읽다. 아침나절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에 왠지 쓸쓸했던 일과, 영원히 내 님이 되어 가까이 있어줄 리 없는 직박구리를 향한 짝사랑만 가슴에 안고, 비탈길을 올랐다. 침엽수라야 측백나무 몇 그루, 온통 헐벗은 참나무들이다. 그러나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 상수리로 불리워졌다는 도토리는 한 알도 눈에 띄지 않는군. 피톤치드와 산소를 넉넉히 뿜길 리가 없는 이 황량한 산도, 주위를 둘러싼 고층 건물들과 꼬리를 물고 달리는 저 자동차들의 매연으로, 겨울철에는 얼마나 가슴 답답하랴.

앙상한 나뭇가지에 낙엽처럼 대롱대롱 메달린 도롱이벌레. 어릴적 시골에서 비오는 날이면 흔히 보았던 도롱이를 둘러쓴 저 녀석. 꾀도 많다. 생명을 위한 보호색과 의태(擬態)의 위장술도, 추위를 막아내는 방한복(防寒服)도 흠 잡을 데가 없는 유비무환(有備無患). 눈바람이 휘몰아쳐도 끄떡 없이 겨울을 날 생명! 모두들 떠나는 이 늦가을에 오 헨리 작 ‘마지막 잎새’되어, 누군가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기름이 될진저.

접근이 쉬운 근린공원인데 산책하는 사람이 별로 없군. 30여 분만에 하산. 황사 때문인지 화선지의 물감처럼 풀린 해가 서산에 걸려 있다. 내려오는 길에 방죽공원으로. 명일공원 끝 자락의 아주 작은 공간인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딴 이름을 붙여놓았군. 그나마 수생식물들도 모두 시들어 생태공원이란 이름이 어쩐지 어색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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